온건한 이낙연 총리의 과감한 대처

[손석춘 칼럼]

2017-12-19 17:32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20gil@hanmail.net
이낙연 총리. 장점이 많은 정치인이다. 무엇보다 겸손하다. 노동운동 출신도 국회의원이 되면 목에 깁스를 한다는 우스개가 실감나는 오늘이지만, 언젠가 국회에서 인사 나눈 의원 이낙연의 목은 이미 다선이었음에도 깁스를 하지 않았다. 그의 문체도 말씨처럼 온건하고 합리적이다. 30대 기자 이낙연이 쓴 정치기사는 논리 정연했다.

그가 전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첫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내심 기대가 컸다. 취임 초기에 이 총리가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임을 틈날 때마다 강조했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는 이 총리의 최근 언행은 고개를 갸웃케 한다.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그의 장점이 동시에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든다. 총리는 최근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작금의 노동 현안이 올 겨울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문재인 정부에 큰 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총리는 또 “노동 현안을 지금부터 지혜롭게, 때로는 과감하게 대처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강조했다. 그가 ‘과감한 대처’를 역설한 ‘노동현안’은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으로 알려졌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9월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그렇지 않아도 문재인 정부의 개혁정책에 사사건건 발목잡고 있는 조선일보로선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총리의 발언을 “노동 현안, 문재인 정부에 큰 짐이 될 듯… 때론 과감히 대처해야”제하에 부각해 보도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추진하는 “친노동정책이 기업 현장에 당장 적용하기가 무리거나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가운데, 이 총리가 ‘정부에 짐이 될 수 있다’고 공개 언급”했단다.

그로부터 일주일 지나 총리는 ‘지속가능발전 기업협의회’ 소속 최고경영자들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 했다. 총리는 “여러분이 하시는 일 또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일을 듣고 정부가 뭘 도와드릴까, 생각하기 위해서 모셨다”며 “소찬이지만 드시면서 현재의 활동내용,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이런 말씀을 많이 들려주시길 바란다”고 권했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노동자들에겐 곤봉을, 대기업 회장들에겐 술잔을 건넨 권력자들은 한국 정치에 하나 둘이 아니어서 익숙한 풍경이다. 기실 그 압권은 박근혜였다.

▲ 2015년 2월24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에서 행사장에 입장해 착석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박용현 한국메세나협회장, 구본무 LG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 연합뉴스
대통령 시절 박근혜는 노동운동에 살천스레 ‘선전포고’를 하며 재벌 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한우 안심, 농어구이, 전복구이, 훈제연어들을 차려 먹이고 개그맨 공연까지 곁들였다. 본란에서 지적했듯이 혈세로 재벌들 불러 향기 넘친 오찬을 즐긴 대통령은 노동자들에겐 쌍심지를 켰다.

[ 관련 칼럼 : 2015년 7월30일 향기 넘친 저들의 밥과 ‘악마의 똥’ ]

나는 박근혜와 이 총리는 결이 다르다고 진심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혹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아닐까라는 의문은 필요하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이 총리로선 듣그러운 말이겠지만, 그 물음이 절실한 사람은 바로 총리 자신이다. 자신의 ‘온건한 합리성’이 혹 일정한 틀(프레임)에 갇힌 것은 아닌가, 그 틀은 과연 자신이 그토록 강조해온 촛불혁명의 틀과 얼마나 부합하는가, 그 질문에 답해보아야 할 사람은 꼭 이 총리만은 아니다. 민주당의 뜻있는 정치인 모두다.

물론, 성찰하지 않아도 총리직은 계속 수행할 수 있을 터다. 다만 결과는 자명하다. 비정규직 비율, 산재사망 비율, 노동시간, 자살 비율이 세계 최고인 대한민국을 바꿔가는 일은 그만큼 더뎌진다.

나는 지금 이 총리, 더 나아가 문재인정부에 노동자 편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최소한 균형은 갖추라는 주문이다. 노동자와 민중에게 ‘공짜 점심’ 따위는 주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촛불정부라면 마땅히 물어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뭘 도와 드릴까요”라고. 공관에서 기업 최고경영자들과 밥 먹으며 총리가 꺼낸 바로 그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