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불행을 전시하는 ‘청년 이야기’는 그만

[미디어현장] 두 ‘자취알못’의 원룸상식사전 취재기 : 정인선 디퍼(Deepr) 기자

2017-12-21 10:24       정인선 디퍼(Deepr) 기자 media@mediatoday.co.kr
운 좋게도 서울에 부모님이 거주하는 집이 있어, 월세 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다. 민달팽이 유니온과의 스토리펀딩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을 함께한 윤지원 기자도 마찬가지다. 때론 구질구질할 타인의 삶을 기사로 담는 게 늘 죄스러웠다.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에 사는 청년 인터뷰이들을 기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게 연례행사예요. 하지만 다음 해면 똑같은 부탁 전화가 와요.” 첫 기획회의에서 임경지 민달팽이 유니온 위원장이 한 말이 오래 머리에 남았다.

[ 스토리펀딩 :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 ]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거실 밖 티비 소리, 방 한가득 차지한 부모님 취향 흙침대가 내 몸과 손에 맞게 꾸민 공간이 줄 수 있는 만족감을 어떻게 빼앗아 가고 있는지 그제야 거슬렸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 속 장면처럼 갈등을 겪을 때마다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도 알게 모르게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청년들이 최저주거기준에 못 미치는 방에 살며 희생하는 것도 자존감이고, 청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캥거루족이 자의 반 타의 반 포기하고 있는 것도 자존감이었다. 목표를 독자들의 ‘주거 상상력’을 넓히는 걸로 잡았다. 그러면 월세 생활자와 캥거루족 모두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한 주거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을 줄이고, 원룸 아닌 집다운 집에서 실험을 해 나가고 있는 청년을 소개하는 내용을 늘렸다.

▲ 디퍼(deepr)가 민달팽이유니온과 함께 기획한 스토리펀딩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
취재 과정에선 ‘자취알못’(자취를 알지 못하는 자)이어서 종종 얼굴이 붉어졌다. 10년 원룸 생활 경력자인 원룸상식사전 편집자 이환희 씨에게 원룸상식사전 부록 ‘좋은 집 체크리스트’를 모두 만족하는 집을 만나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체크리스트가 왜 필요한지 몰라 던진 우문이었다. 완벽한 원룸은 있을 수 없고, 통풍, 채광, 방음, 위치 등 여러 기준 중 그나마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고민해 볼 틈도 없이 얼렁뚱땅 임대차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체크리스트가 필요한 거였다.

임차인(賃借人)-임대인(賃貸人)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 ‘집주인은 큰(大) 사람이니까 임대인’이라고 외우기도 했다. 사실 세입자-집주인이라는 말이 독자들의 이목을 잡기엔 더 좋다. 말에서 이미 위계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의 불행을 전시하지 말자는 목표에 안 맞았다. 민달팽이 유니온이 임대차계약서와 원룸상식사전을 만든 이유도 바로 그 세입자-집주인 간 위계를 허물고, 임차인-임대인이라는 법적 용어를 통해 둘 사이에 동등한 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기사가 좀 덜 팔리더라도 법률적으로 정확한 용어를 쓰기로 했다.

▲ 디퍼(deepr)가 민달팽이유니온과 함께 기획한 스토리펀딩 ‘튼튼한 임차인의 필수품 원룸상식사전’
민달팽이 유니온과 원룸상식사전에 반해 협업하길 잘 했다고 뿌듯해 한 순간도 있었다. 8월에 열린 ‘원룸상식사전 함께 읽기 집담회’에서 민달팽이 유니온은 “집주인이 월세 세액공제를 꺼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고민하는 청년 임차인에게 “3년 안에 경정청구가 가능하니, 굳이 (거주하는 동안) 입주인과 얼굴 붉히지 마세요”라고 답했다. “공용 전기세 계산 및 공지를 직접 하겠다고 하는 대신, 본인은 관리비를 좀 깎아 달라고 하세요” 같은 꿀팁도 알려줬다. 당위도 중요하지만 당장 집주인과 관계 맺어야 하는 청년 임차인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곳곳에서 보였다.

▲ 정인선 디퍼(Deepr) 기자
법에 살짝 눈감는 방법까지 알려줘야 한다는 자체가 청년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디퍼를 읽는 청년 독자 입장에선, 다른 어디서 알려주지 않는 희소하면서도 당장 필요한 정보이기도 했다. 한 지인이 남겨 준 후기처럼 임대차계약이 “우리 이름으로 하는 가장 사적이고 중요한 계약”이라면, “청년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집을 계약할 때 겪는 여러 문제에 대한 가이드북”은 사실 성인이 되기 전 사회와 학교에서 다 배웠어야 한다. “책이 많이 팔리면 많이 팔리는 대로 속상하다”는 임경지 위원장의 말과는 살짝 달리, 앞으로도 청년 독자들이 당장에 처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담으면서 동시에 잘 팔리기까지 하는 기사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