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의 임신여부와 태극기 기립

[미디어오늘 1138호 사설]

2018-02-14 14:45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김영남은 서울 공연에서 세 차례 눈물을 보였다.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으면 우리가 피눈물을 흘려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정상혁 조선일보 기자가 쓴 ‘기자수첩’(2월13일) 가운데 일부다. 북한 예술단이 공연하거나 머물렀던 장소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그것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북한 예술단 삼지연관현악단이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특별 공연을 펼쳤는데, 그곳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 도중 북한 공작원 문세광에게 피격 살해된 곳이라는 것. 강릉아트센터 공연도 마찬가지. 정상혁 기자는 “강릉은 1996년 북한군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곳”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조선일보의 이런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등을 돌린 채 살아야 한다. 총부리를 겨누고 피까지 흘린 전쟁을 겪은 한반도에서 ‘예외적인 장소의 역사성’이 있을까.

▲ 2월13일 조선일보 30면에 실린 칼럼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일보의 이런 기준이 미국과 일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창올림픽 리셉션과 개막식 등에서 외교적 결례를 보인 일본 아베총리에 대해 조선일보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일제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 입장에선 대단히 불쾌하게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을 아베 총리는 방한 기간 내내 했지만 조선일보는 아베에 대해선 날을 세우지 않았다.

미국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마찬가지. 심각한 수준의 외교적 결례를 보였음에도 조선일보는 이를 강하게 문제 삼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북한과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 ‘각’을 세우면서도 ‘할 말을 해야 하는’ 미국과 일본을 향해선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조선일보 보도를 두고 한반도 정세가 대결국면에서 평화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냉전세력’의 제동걸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언론의 태클 걸기가 조선일보만의 문제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대북문제에 있어 유연함을 보여 왔던 중앙일보도 최근 ‘대북강경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부각되는 올림픽…평창 이후 ‘청구서’ 날아오나’(2월9일자 3면), ‘김여정엔 식사 대접 네 번, 펜스엔 한 번, 아베는 0’(2월13일자 6면)과 같은 기사를 지면에 주요하게 배치하면서 대화국면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조선·중앙일보 뿐만 아니라 북한 고위급 대표단 방한과 관련한 언론보도는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다. 상당수 언론이 주목해서 보도해야 할 사안은 외면한 채 ‘미일 홀대론’과 같은 기사를 계속해서 양산했다. ‘평창올림픽이 평양올림픽이 됐다’는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의 주장을 여과없이 보도하는가 하면 TV조선은 북한 선수단 숙소를 촬영해 무리한 취재라는 비판도 받았다. 북한 응원단이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했다는 어이없는 오보까지 등장했다. 사실 확인 과정을 거쳤다면, 북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나올 수 없는 오보였다.

▲ 지난 2월11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북한 예술단 공연을 관람하는 도중에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미일 홀대론과 평창올림픽에 대한 색깔공세, 가십성 기사에 무게중심을 둔 언론은 정작 ‘깜짝 놀랄 일’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난 9일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제창 때 북한 응원단과 함께 자리에 일어서는 파격을 선보였다.

북한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북한 사람이 ‘적국’인 한국 국기 게양과 국가 제창에 일어선다는 건 북에서 정치범으로 몰릴 일”이다. “한국의 청와대 고위인사가 평양에 가서 북 인공기 게양과 국가가 울릴 때 기립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이념·색깔론을 동반한 파상공세를 펼쳤을 것이다. 그만큼 북 고위급 대표단 일행은 방한 기간 동안 예상을 뛰어넘은 파격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비중 있게 보도한 곳은 많지 않았다. 김여정 부부장의 임신 여부보다 이런 파격이 훨씬 더 보도가치가 있다는 건 상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