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보도, 2차 가해 부추기는 언론

‘미투’ 운동 확산 분위기에 성범죄 보도 권고 기준 무시, 자극적 보도 난무… 정치권 정략적 행태도 여전

2018-02-20 20:58       강성원 기자 sejouri@mediatoday.co.kr

△성추행 논란으로 활동 중단한 이윤택 감독은 文 대통령 고교 동창’(월간조선) △이윤택 문재인 대통령과 고교 동창 인연…과거 지지 연설하기도 “표 직접 팔아준 아름다운 사람”(전자신문) △‘성추행 논란’ 이윤택, 문재인 대통령과 무슨 사이? “단순 동창생 아냐…”(한경닷컴)

지난 19일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공개 사과 기자회견이 논란이 되자 언론이 쏟아낸 기사 중 일부다. 위 기사들 모두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이씨의 기자회견 발언이 실시간 이슈가 되자 이번 문화계 ‘#미투(MeToo)’ 운동과는 전혀 관련 없이 오직 이씨와 문재인 대통령의 관계를 부각한 언론의 전형적인 어뷰징(abusing) 행태가 또 나타났다.

미투 운동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하고 언론이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근래 서지현 창원지검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사실 폭로 이후 많은 성폭력의 원인이 권력의 유무를 떠나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에서 비롯됐음을 지적하는 사회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이 모든 ‘미투’ 운동의 물결이 언론의 무책임하고 선정적인 보도가 아닌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있었기 때문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언론이 피해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버팀목이 돼 주진 못할망정 미투 운동 확산 분위기를 이용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과 같다.

▲ 지난 19일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기자회견 이후 쏟아진 문재인 대통령 관련 어뷰징 기사들.
서지현 검사는 지난달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범죄 피해자분들께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밝혔다. 성폭력이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오랫동안 자책감과 고통에 시달렸는데, 피해 사실을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지난 1일 언론노보 기고문(JTBC 손석희 앵커는 굳이 ‘틀려먹은’ 질문을 했어야 했나)에서 미투 운동의 확산이 필요하지만 우리 언론은 여전히 충분히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지적했다. 권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묘사하면서 당시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된다”며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사실을 반복해 이야기하도록 하는 건 성폭력 사건에서 가장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서지현 검사 인터뷰를 전한 JTBC마저도 ‘피해자 중심’ 원칙에서 볼 때 아쉬운 보도였다는 평가다.

지난 2012년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경쟁적 취재, 흥미 위주의 보도가 만들어 낸 2차 피해의 반성으로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는 그해 12월12일 성범죄 보도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마련했다.

7개의 총강과 10개의 실천 요강의 몇 개 조문만 읽어 보더라도 지금의 언론이 얼마나 피해자 인권을 배려하지 않은 보도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언론은 성범죄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 등을 보도함으로써 피해자에게 범죄 유발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하지 않는다.

-언론은 가해자 중심적 성 관념에 입각한 용어 사용이나 피해자와 시민에게 공포감과 불쾌감을 주고 불필요한 성적인 상상을 유발하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언론은 성범죄 사건의 이해와 상관없는 범죄의 수법과 과정, 양태, 그리고 수사과정에서의 현장 검증 등 수사 상황을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은 사진과 영상 보도에서도 피해자 등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특히 삽화, 그래픽, 지도 제공이나 재연 등에 신중을 기한다.

▲ 구성·그래픽=손가영·안혜나 기자. ⓒ pixabay
언론이 사회 각계로 번지는 미투 운동과 공익적 보도 가치가 있는 성폭력 문제를 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아무리 공익과 국민 알 권리를 위한 보도라도 언론이 피해자의 인권을 경시하고 때로는 무죄추정원칙을 무시한 단순 고소·혐의 보도를 남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실제로 언론이 보도해 논란이 일었던 공인 또는 유명 연예인들의 성범죄 혐의 중 상당수가 무혐의로 종결됐다. 그러나 언론이 허위보도로 인한 명예훼손의 법적 책임을 지는 경우는 드물고, 보도 당사자들은 후에 무고함이 밝혀지더라도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받게 된다.

지난 2016년 언론중재위원회가 일부 유명 연예인들의 성폭행 혐의 관련 기사를 낸 218개 매체를 상대로 낸 시정권고 결정문을 보더라도 “언론은 연예인이 성폭행했다는 고소 사실을 보도하면서, 고소장 또는 고소인의 일방적 주장만을 근거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관계와 그에 따른 범죄 혐의를 보도했다”며 “유명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확정되지 않은 성폭행 혐의사실 및 그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생활의 핵심 영역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언론이 성범죄 관련 자극적인 보도를 하더라도 근본적인 성범죄 예방을 위해 법률적·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이 성추문 파장을 키우며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지난해 5월 불거진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성추행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도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은 지난 19일 논평에서 피해 당사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피해 사실을 여과 없는 표현으로 전달하는 인권 의식 부재를 드러냈다.

일차적으론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언론 보도의 문제지만, 정치권의 무책임한 2차 가해도 우리사회에 미투 운동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20일 논평에서 “이번 민주당의 성추행 사건을 지적하는 한국당의 수석대변인 논평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며 “타 정당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피해 사실을 자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서술하는 것도 2차 가해 행위임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질타했다.

최 대변인은 또 “사회 각 분야에서 끊임없는 ‘미투’ 운동이 이어지는 이때, 정치권부터 자기반성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다시 한번 새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