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 가라앉히는데 걸린 나흘

[미디어오늘 1148호 사설]

2018-05-02 14:09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조선일보가 모처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다. 조선일보는 5월1일자 사설에서 “청와대가 4월30일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한 걸) 국회에 동의안을 제출하더라도 처리 과정에서는 북미 정상회담까지 결과를 보고 하자는 것’이라고 밝힌 것은 적절했다”고 평가했다. “성급할 이유가 없다”는 훈수와 함께.

조선일보는 국회 비준 동의가 후속되지 않아서 10·4 합의가 이행되지 않았다는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인정했다. 청와대도 북미 회담에서 북핵 폐기가 명확해지지 않으면 어차피 남북 회담의 모든 성과가 헛것이 되는 만큼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북미 회담을 지켜본 뒤 국회 비준 동의를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 4월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인사를 나눈 뒤 공식 환영식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반면 중앙일보는 조선일보와 달리 사설에서 ‘남북 화해 속도전, 북미 회담 이후에도 늦지 않다’며 청와대에 속도전을 경고하고 나섰다.

한겨레신문도 ‘북미 비핵화 속도전에 숨은 암초 살펴야’ 한다는 사설을 써 제목만 보면 중앙일보와 궤를 같이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사설 결론에선 “북미가 속도를 내는 만큼 우리 정부도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며 속도전을 주문하면서도 미국의 움직임에 눈여겨 보라고 주문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볼턴 안보보좌관의 온도 차가 ‘숨은 암초’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겨레는 1일자 4면 ‘“속도감 있고, 되돌릴 수 없게”… 문 대통령 후속조처 강조’란 기사에서도 “국회 비준 통합 합의 제도화를 추진하되 국회의 동의 여부가 또다시 새로운 정쟁거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대통령의 말을 옮겼다.

한겨레와 중앙일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선언을 속도감 있게 후속 조치할 것을 강조했다”는데 방점을 찍었지만, 조선일보는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고 국회 비준을 추진하겠다는 청와대의 입장이 적절했다고 봤다.

청와대 속도전을 보는 두 시선이 충돌하고 있다. 어느 쪽이 제대로 봤는지는 지켜보면 드러날 것이다.

정상회담 직후 흥분했던 언론 보도는 1일자에 와선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사실 조선일보는 남북 회담 다음 날 시론에 ‘북한이 절대 비핵화하지 않을 4가지 이유’라는 황당한 칼럼을 싣기도 했다. 반면에 미화찬양의 극치를 달리는 언론도 제법 보였다. 언론이 감정을 추스르고 정제된 언어로 한반도를 바라보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중앙일보는 “국회 비준 전에 남북 회담 만찬에 배제됐던 야당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판문점 선언을 설명하는 절차를 먼저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구체적인 절차까지 주문했다.

세 신문이 약간씩 다른 시각을 보여줬지만 20여 일 남은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이미 확인된 북한 태도보다는 미국 움직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실 북한 입장에선 체제 보장 약속 주체가 미국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북미 회담이 한반도 미래에 더 결정적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 gettyimagesbank, 연합뉴스
모든 언론이 북미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점찍은 만큼 앞으로 20여 일 동안 미국 관료들의 한국 방문이 줄을 이을 것이다. 미국의 속내가 볼턴이 언급한 ‘리비아 모델’인지, 폼페이오가 말한 “상응한 제재 완화 검토”인지를 놓고 설왕설래 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 단독 욕심이 불러올 수많은 언론 참사도 예견된다.

우리 언론은 ‘리비아 모델’를 쉽게 활자화 한다. 리비아 카다피는 역사상 비핵화에 동의한 유일한 독재자였다. 그러나 카다피는 2011년 ‘아랍의 봄’ 때 권좌에서 쫓겨나 살해됐다. 리비아 모델은 김정은 국방위원장 보고 죽으라는 소리다. 카다피 이후 리비아를 봐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리비아 국민들은 지금도 정치, 경제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 더욱이 독재자 카다피의 둘째 아들이 “리비아 정계 복귀”를 당당하게 선언할 만큼 혼란스럽다. 리비아 모델은 무책임의 극치다.

눈 맑은 수용자가 언론보도의 실체를 깨닫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권력의 눈치는 안 보더라도 모두들 국민의 눈치는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