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史草)에서 비롯된 사화(史禍)

[사관(史官)은 말한다]

2018-05-12 09:42       신채용 역사학자 media@mediatoday.co.kr

집권 4년차의 연산군은 1498년 7월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을 능지처사(陵遲處死) 했다. 연산군은 이 사실을 종묘(宗廟)에 고한 뒤 “간신의 무리를 죽여서 더할 나위 없이 경사스럽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김일손을 모두 충신열사로 기억한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史禍)다. 사초(史草)가 빌미가 되어 일어난 정치 탄압이었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세력은 앞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해 오던 보수 관료군인 훈구파와 수양대군의 증손자 연산군이었다. 피해를 입은 쪽은 산적한 국정 현안에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부패로 얼룩진 훈구와 달리 철저한 자기관리로 도덕적으로도 흠 잡을 곳이 없었고, 성종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면서 조정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사림파였다. 안타깝게도 성종이 38살 젊은 나이에 승하하면서 처가가 훈구파로 똘똘 뭉친 세자(연산군)가 즉위했다. 훈구파는 어리석은 왕을 이용해 자신들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던 사림파를 밀어냈다. 정치 경륜이 짧고 세력도 약했던 사림파는 폭군을 앞세운 노회한 훈구파 앞에 의리와 명분 밖에 의지할 게 없었다.

사초가 도대체 뭐길래 수많은 충신들의 목숨까지 앗아갔을까. 사초란 실록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들이 왕의 언행 하나하나를 그 자리에서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다. 시정기는 왕의 일상부터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 인물 비평도 들어있는 실록의 원천자료이다. 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 악행이 실록에 그대로 실려 후세에 전해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이전까지 사초를 빌미삼아 정치 탄압을 가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무오사화는 살인에 맛 들인 폭군과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훈구파가 최소한의 명분마저 내 던져버린 사건이다. 이들이 비록 현실의 권력 장악은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역사에선 죄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사초가 가진 정의의 힘 덕분이다.

그렇다면 사초를 작성하는 사관은 어떤 사람을 임명하는가. 조선왕조에서 사관이 되려면 국정 현안에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사관은 대부분 과거 성적이 우수하면서 학식이 출중했다. 게다가 역사기록물의 특성상 옳고 그름의 시비 판단도 해야 했기에 도덕적 흠도 없어야 했다.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발을 들인 연소한 사관 중에는 올곧은 의리와 명분에 투철한 인사가 많았다.

무오사화로 죽은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년)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고 춘추관 기사관이 돼 성종실록의 사초를 작성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훈구파들의 부정과 비행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 김종직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죽인 사건에 빗대 표현한 ‘조의제문(弔義帝文)’도 기록돼 있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적장자로서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던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고,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면서 왕이 됐다. 게다가 자신에게 협력한 자들을 공신에 봉하고 그들과 사돈관계까지 맺으며 권력 기반을 굳건히 해 주었으니, 바로 그들이 훈구파다. 그 뒤 반세기가 흐르면서 수양대군과 훈구파의 불의와 무능을 절감한 지식인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그런 인식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로 나타났다.

명분과 의리를 앞세우고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무능과 부정을 비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은 훈구파의 손에 있었다. 결국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훈구파 이극돈이 유자광과 승지 신수근(연산군의 처남)과 함께 폭군을 부추겼다. 그 결과 김일손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고 그의 사초는 불태워졌다. 훈구파의 존립 근간이 의롭지 못한 사실을 비판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러나 훈구파는 그 대가를 영원토록 치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잠자던 연산군의 살인 마성을 깨워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고 그 결과 6년 뒤 자신들도 똑같이 당했다. 인과응보였다.

지봉 이수광은 “정승은 현실의 권력자이지만 사관은 사후의 권력자”라고 했다. 역사에 기록되면 수 천 년 뒤에도 주홍글씨처럼 전해진다. 현실의 이익과 권력을 쫓았는지, 인간의 이치를 따랐는지는 직필(直筆)의 사론(史論)을 가진 사관(史官)만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