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만에 소환된 강주룡

[미디어오늘 1151호 사설]

2018-05-23 16:40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미국 신문계는 자본주의가 발달해 신문도 완전히 대자본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그들의 한 수중물이 되고 말았다. 미국 각주의 신문과 잡지는 각각 그 지방의 산업경영자의 수중에 들고 말았다. 미시간주의 신문은 구리업자, 콜로라도의 신문은 석탄업자, 펜실베이니아와 일리노이는 구리 철강업자, 위스콘신과 오레곤은 목제업자, 노스다코타와 미네소타는 제분업자, 캘리포니아는 유나이티드 철도의 소유에 떨어졌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두 번째 미디어비평지 철필(鐵筆) 창간호(1930년 7월)에 실린 ‘세계신문 진단’이란 제목의 칼럼 중 일부다. 오늘날 미디어오늘과 같은 성격의 이 잡지는 심훈 주간과 한규상 발행인이 합작해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디어비평지는 1925년에 나왔다는 ‘신문춘추’가 있지만 실제 발행 여부는 모른다. 3년 뒤 1928년 22살의 젊은 조선일보 김을한 기자가 만든 같은 이름의 ‘신문춘추’는 실물이 남아 있는 최초의 미디어비평지다. 그러나 내용은 빈약했다.

1930년에 나온 미디어비평 잡지 ‘철필’은 1930년 7월 창간해 1930년 1월호까지 4번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내용은 풍부했다. 철필 창간호는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기자를 공개채용했던 조선일보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나는 왜 신문기자가 되려는가’라는 논문과 ‘종각에 불이 나면 어떻게 무엇을 조사해 보도할까’라는 기사작성에 이어 시사용어 20여개를 나열하고 간단히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1930년 조선일보는 100여 명이 응시한 공채시험에서 5명을 뽑았다.

철필 1930년 9월호에는 미국 뉴욕타임스와 러시아 프라우다를 방문하고 후기를 비중있게 썼다. 철필 1930년 9월호에 가장 의미 있는 글은 중외일보 김만형 기자가 쓴 ‘평양고무 파업’ 취재후기다. 김 기자는 평양의 11개 고무공장 2300여 명이 동맹파업을 그 원인부터 분석한다. 

평양은 1923년 처음 평안 고무공장이 문을 연 뒤 1930년 당시 11개 공장이 들어서 기생과 환란의 도시 평양이 고무공업의 도시로 변모했다. 20년대 중반 호황 땐 1년에 40~50%의 배당수익을 챙겨 졸부가 된 투자자도 있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자 고무공업연합회는 직원들 임금 10% 삭감을 결의했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무 노동자들은 평양의 고무 사장들이 1930년 8월 7일부터 10% 임금 삭감을 발표하자 같은 날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800명이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의 관건은 기술자 300명과 최고 기술자 40명의 태도였다. 이들도 나흘 뒤 파업에 가담해 파업이 완성됐다. 철필은 세계대공황과 평양 고무공장 파업의 관계, 노동자 국제교류의 사례도 소개했다. 철필의 취재후기는 신변잡기나 관음증을 자극하거나 광고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오늘날 기자수첩과 많이 다르다.

▲ 1931년 5월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임금인하 반대 농성을 벌이는 평원고무 여성 노동자 강주룡.
회사는 신규채용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렸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사장들은 중국인으로 대체근로 시키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미리 중국 쪽에 손을 써 이마저도 무산됐다. 이 싸움은 무승부로 비기고 노동자들은 현장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해를 넘기고도 계속 임금삭감안을 만지작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20)은 1931년 5월 30일 새벽 평양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을밀대 기와지붕 위로 올라갔다.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강주룡의 목숨 건 싸움 덕분에 사장들은 임금삭감을 철회했다.

박서련 작가가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삶을 그린 소설 ‘주룡’으로 올해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주룡은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석방되고 얼마 뒤 숨졌다.

박서련 작가가 90년 세월을 건너 강주룡을 소환했듯이 미디어오늘도 미디어의 이면을 살피며 23년을 보냈다. 앞으로는 스스로도 돌아보며 시간의 강을 건너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