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과 대사간

[신채용의 史臣曰]

2018-05-23 15:54       신채용 역사학자 media@mediatoday.co.kr

폭군 연산을 몰아내고 새 임금이 들어선 지 10년이 지났지만 백성들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지만, 사람들이 변하지 않아서다. 중종을 추대한 반정공신들은 훈구파였다. 이들은 갑자사화로 자신들까지 폐족(廢族) 위기에 처하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훈구파는 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핑계로 막강한 정치·경제의 이권을 챙겼다. 게다가 왕실도 변하지 않았다. 중종의 어머니와 왕비는 훈구의 핵심 가문이었고, 공신들도 자신들 자녀를 임금의 후궁이나 사위인 부마로 들이면서 왕실의 외척으로 변해갔다. 왕의 친인척이라는 성분이 왕조시대 가장 막강한 정치 기반이란 사실을 잘 알았다.

세월이 무심하지만은 않았다. 공신 3대장,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늙어 죽고 역모를 꾀한 공신이 적발되면서 공신들 입지도 현저히 줄었다. 중종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삼사를 통해 새 정치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삼사는 학술, 간쟁, 규찰을 담당하는 독립기관으로 언론과 사법기관의 성격을 지녔다. 때문에 정승 판서를 장악한 공신계를 견제할 지렛대가 됐다. 때마침 사림파 영수로 추앙받던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조광조는 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한 유생들의 전폭 천거로 조정에 나왔다. 이미 진사에서 장원한 출중한 학식뿐만 아니라 유학의 실천에 독실한 자세를 지녔기에 가능했다.

▲ 조광조.
조광조가 처음 벼슬을 받던 날 이행(李荇)도 사간원 대사간(정3품)에 임명됐다. 이날 사관은 두 사람의 인물평을 이렇게 남겼다. 이행은 겉으로는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지만 실제는 착한 사람들을 싫어해 훗날 사림을 해칠 사람이고, 조광조는 자기 말을 실천하고 예법을 따르기에 당시 선비들이 사모하는 인사라는 것. 사관의 붓은 직필이었을까.

조광조는 과거(대과) 급제 3개월 만에 사간원 실무자인 정언(정6품)이 되자, 곧장 자신이 속한 기관의 장인 대사간 이행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검사가 검찰총장을 탄핵한 셈이다.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는 사건이지만 조광조의 강직한 성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관은 ‘조정의 여론이 통쾌하게 여겼고 사림이 기뻐했다’고 평할 만큼 조정엔 일대 파란이 일었다. 조광조가 이행을 탄핵한 이유는 그가 언로(言路)을 맡은 기관의 수장인데도 임금에게 상소한 인물들을 죄인으로 몰아 탄압해 언로를 막아버려서다. ‘아무 죄 없이 공신들에게 쫓겨난 중종의 원래 부인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대사간이 언로를 막은 것은 임금의 후원을 받아 파죽지세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던 사림파의 기세를 꺾기 위한 기득권 공신계의 입장을 대변한 조처였고 임금을 불통(不通)으로 몰고 가는 처사였다.

500년 전 조광조라는 일개 정언(정6품)이 어떻게 소속 기관의 장을 거침없이 탄핵할 수 있었을까. 이행은 18살에 급제한 소년등과 출신인데다 태조 이성계의 외손이면서 자신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당대 제일의 권세가였다. 이행은 요직을 거쳐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고급 관료인 정3품 당상관의 첫발을 대사간으로 임명받았다. 불과 38살에. 이행이 가진 능력과 배경은 원칙과 명분을 목숨처럼 여긴 조광조에겐 그저 허울뿐이었을까? 대답은 사림의 문화와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임금을 성인으로 만들어가는 첫 걸음을 ‘소통’이라고 보고 그것을 뒷받침 할 제도를 만들었다. 핵심은 인사권이었다. 이 사건 이후 사간원을 비롯한 삼사 실무 관료의 인사권은 소속 기관의 장이 아니라, 조정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이조에서도 5~6품의 당하관인 전랑(銓郞)이 가지게 됐다. 물론 최종 결정은 임금이 하지만 이른바 삼사의 관리가 될 후보자의 추천권을 ‘이조 전랑’이 맡았다. 이를 청직(淸職)에 통하게 한다고 해서 통청권(通淸權)이라고 한다. 삼사의 관리들은 간쟁 하면서 최고 권력자 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속한 수장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기에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서 권력자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면 맹렬히 비판해 여론을 주도했다. 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이 관직에서 물러나는 책임도 졌다. 그래서 삼사의 관직을 깨끗한 ‘청직’이라고 불렀다.

▲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택리지의 저자 청담 이중환은 이런 제도가 있었기에 연소한 신진 관리가 기성 관리를 비판하고 하급 관리가 고위 관리를 견제해 300년 동안 큰 권력을 가진 간신의 출현을 막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