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선택에 직면한 이재용 부회장

[기고]

2018-05-23 14:18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media@mediatoday.co.kr
지난 21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5월말로 예정된 현대모비스의 분할법인과 현대글로비스간의 합병을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조금 거친 비유를 하자면 타자가 타석에서 스윙을 시작하다가 배트 끝이 돌아가기 직전에 멈춘 것과 흡사하다. 잘한 일이다. 이로써 이 일에 연관된 많은 실무자들이 감옥과 징계와 소송의 문턱에서 해방되었다. 슬퍼하는 이가 있다면 아마 엄청난 소송거리를 놓친 대형 로펌 정도라고나 할까. 합병안이야 잘 만들어서 다시 추진하면 된다.

현대차의 결정으로 더욱 심한 궁지에 몰린 쪽은 삼성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억지로 추진한 혐의로 재판중이다. 마치 헛 스윙을 한 타자가 삼진 아웃을 받아야 하는데, 심판 매수해서 출루한 것과 흡사하다. 문제는 심판을 매수한 것이 드러나면서 본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의선 부회장의 결정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더욱 큰 숙제를 안겼다.

▲ 지난 2월5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만에 구치소에서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이재용 부회장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넓은 문을 선택하는 것이다. ‘장충기 문자’에서 드러났듯이 본인에게 조아리는 관료, 학자, 언론인은 부지기수고, 정치인도 이심전심이다. 승계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사실상 다 끝났다. 남은 것은 국정농단 관련 소송인데 여기저기에 약친 게 또 얼마인가. 다 잘 될거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건이 조금 시끄럽지만, 이건희 차명계좌 때처럼 금융위가 잘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해 줄 거다. 조금 어려우면 엘리엇 팔아서 애국심 마케팅하면 된다. 그냥 뭉개고 가자. 나중에 돈이나 한 1조 원 출연해서 공익재단이나 하나 더 만들지 뭐.

그러나 넓은 문은 패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세상이 느리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기 중에 있는 대통령도 탄핵으로 끌어내려서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국민들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권도 조금 바뀌었다. 이건희 차명계좌 때 금융위가 필사적으로 방어해 주었지만 결국 차등과세와 과징금 모두 부과되지 않았던가. 남은 것은 언론, 친재벌 학자와 정치인들뿐인데 이들은 바람만 바뀌면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이라 의지하기 어렵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연합뉴스
무엇보다 승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승계의 핵심은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고리가 튼튼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조를 섣불리 바꾸자니 금산법 제24조의 규제가 눈을 부라리고 있고, 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니 보험업 감독규정에 대한 개정 압박이 눈에 거슬린다. 삼성생명은 고객 자산을 계열사 주식에 집중투자(소위 ‘몰빵’)하지 말라는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열사 주식 가치를 공정가치가 아니라 취득원가로 평가하도록 하는 장난질을 쳐서 삼성전자에 몰빵하는 구조를 억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장난질을 이제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최근에는 믿었던 금융위 마저 “알아서 시정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등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부친이 살던 집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이전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집의 구조가 너무 허술해서 그대로 들어가 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 부회장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좁은 문이다. 그것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중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삼성이 이 두 회사를 동시에 지배하는 것은 금산분리 규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이제까지는 그것을 온갖 궤변으로 정당화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중간금융지주회사 도입은 극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회사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사자의 선택이다. 선택하기 쉽지 않고, 모양새도 빠지는 일이다. 그래도 필자는 좁은 문을 권하다. 그 길만이 파국을 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죽는 길이 곧 사는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