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ID의 길을 걷고 있는 조선일보

[비평] 북미정상회담과 자유한국당 지방선거 참패 속 갈 길 잃은 조선일보

2018-06-20 13:22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지금 한국당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앞날이 정해진 것 같다. ‘혹시’ 했으나 ‘역시’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6월19일자 조선일보 사설 “혹시 했으나 역시로 가는 한국당”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자유한국당을 걱정할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조선일보 또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이은 보수야당의 지방선거 참패 속에 자유한국당과 같은 흐름으로 고립되고 있어서다.

고립의 징후는 지난 5월29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논평에서 나타났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이 “청와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매우 공격적인 논평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논평이기도 했다. 특정 언론사를 공개 비판하는 것이 가져올 불가피한 논란을 감수한 감행이었지만 여론의 반응은 오히려 청와대에 우호적이었다. 당장 조선일보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사가 당시 논평과 관련해 청와대를 비판하지 않았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조선일보는 4·27 남북정상회담 무렵부터 두 정상의 역사적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대다수 내외신과 달리 날을 세우며 여론을 비껴갔다. 예컨대 4월28일자 조선일보 톱기사 제목은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운은 뗐다”였다. 같은 날 동아일보 톱기사 제목이 “완전한 비핵화 문을 열다”였던 점을 비교해보면 명확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신문은 5월28일자 사설에선 “한국 대통령이 북의 편에 서서 미국의 협상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고립의 또 다른 징후는 자유한국당 대변인이자 전직 조선일보 편집국장인 강효상 의원과의 갈등이었다. 강 의원은 5월31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께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의 파면을 주장했다. 강 의원은 양상훈 주필의 5월31일자 칼럼을 가리켜 “한겨레신문을 보고 있는지 깜짝 놀랐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앞서 양상훈 주필은 ‘역사에 한국민은 전략적 바로로 기록될까’란 제목의 칼럼에서 “北의 비핵화를 믿으면 바보라지만 때로는 바보가 이기는 경우도 있다. 북한 땅 전역에서 국제사회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팀이 체계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자체로 커다란 억지효과가 있다. 북이 지금처럼 대놓고 서울 핵폭발 위협은 하지 못한다”고 적었다. 이를 두고 강 의원은 “그동안 북한의 핵 공갈에 겁먹은 한국사회 일각의 논리와 판박이”라며 “좌파들이 또 속이고 장난치고 있는데 다른 언론도 아니고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조선일보가 이에 동조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 ⓒ연합뉴스
이 사건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이 미국 트럼프 정부의 호응을 얻으며 순항하자 조선일보가 주도해온 ‘북한과 대화협상=죄악’이란 프레임은 갈 길을 잃었다. 조선일보는 지방선거에서 필패할 것이 자명한 자유한국당 세력의 주장을 더 이상 안고 갈 수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일보 ‘주필’이 자유한국당 세력과의 결별을 예고하는 뉘앙스의 칼럼으로 출구전략을 내놓자 자유한국당이 조선일보 출신 국회의원을 앞세워 칼럼의 맥락을 과대해석하며 조선일보의 ‘이탈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강효상 의원은 “공교롭게도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조선일보를 협박한 이틀 뒤에 이런 칼럼이 실렸다”, “이건 마치 조선일보가 청와대에 백기 투항을 한 것과 같다”고 주장하며 조선일보의 자존심을 긁었다. 이 같은 강 의원의 ‘공개편지’는 역설적으로 ‘전멸 위기’를 감지한 자유한국당이 조선일보를 잃을 수 있다는 다급함을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늘 대북지원과 협상 중심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며 보수언론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틀 뒤인 6월17일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를 위해 방북한 16명의 기자들 중 조선일보 기자만 입북이 거부된 이후 조선일보는 7월11일자 “조선일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란 제목의 대형사설을 내며 마치 자신들이 북한을 비판하고 정부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탄압을 받는 식의 프레임을 만들며 논조의 영향력을 키웠다. 조선일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국의 보수진영을 지탱해온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지켜왔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당시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데올로기였다.

▲ 6월12일자 JTBC보도화면 갈무리.
그러나 이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으며 조선일보는 과거의 조선일보와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낡은 논조와 결별해야 조선일보가 살 수 있다. 하지만 논조변화는 중장년층 충성 독자들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 경우 지금껏 누려왔던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일보는 북미정상회담 직전까지 문재인정부를 밀어붙였다.

이 신문은 6월4일자 사설에서 “지금 북핵 협상은 미·북이 하고 있다. 한국은 발도 들이지 못하고 귀동냥만 하고 있다”며 ‘코리아 패싱’을 주장하는가 하면 “미·북 협상으로 북핵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대북 지원으로 우리 등골이 휘는 일은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며 경제적 공포를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삼성증권은 6월13일 ‘한반도 CVIP의 시대로’란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남한은 방위비 감소, 이념 및 체제 유지비 소멸, 남북한 지역경제의 결합 등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북한은 군수산업 비중을 축소해 왜곡된 산업구조조정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제 조선일보는 삼성증권마저 좌파라고 비판해야 할 처지다.

북미정상회담 다음날인 13일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결과물은 구체성이 없는 큰 틀의 합의에 그쳤지만, 과거 실패로 끝난 합의들과는 기본적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예단하기는 이르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에서 톱다운 방식의 접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 합의는 양국 최고지도자가 직접 만나 의지를 담은 것인 만큼 무게감이 다르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같은 날 사설에서 “이번 미·북 정상 합의문은 13년 전 6자회담 공동성명보다도 더 뒷걸음친 것이다. 충격적이기에 앞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조선일보의 논조와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가 갖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 6월13일자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더불어 이날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의 칼럼 제목은 ‘대한민국 농락 리얼리티 쇼’였다. 양상훈 주필은 “합의문 자체가 완벽한 맹탕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농락을 당한 것 같다”고 혹평했다. 강효상 의원의 ‘협박’이 통한 건지, 조선일보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기미가 없다.

그리고 자유한국당은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처럼 혹독한 야당심판은 여태껏 없었다. 이는 외교안보분야에서 자유한국당 입장을 확대재생산해왔던 조선일보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항상 한미동맹을 ‘목숨’처럼 강조해왔던 조선일보는 이제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마저 연일 비판해야 하는 처지다. 

‘미국, 때론 우리를 배신했다’란 제목의 6월4일자 칼럼에서 조중식 국제부장은 “우리 역사에서 미국이 항상 은인이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궁색한 주장을 펼쳤다. 아노미 상태에 빠진 보수진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선일보가 달라진 시대에도 트럼프와 김정은이 갈라서기만을 기다리다가는 자신들이 ‘CVID’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