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은 보수의 아성인가

[사설]

2018-06-22 14:28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대구·경북은 보수의 아성인가

6·13 지방선거로 자유한국당은 대구·경북 지역정당으로 전락했다. 대구·경북에 기반한 온라인매체 ‘뉴스민’은 선거 내내 대구·경북 곳곳을 돌며 보수에 몰표 주는 그곳 주민을 취재했다. 뉴스민이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속절없이 대구시장과 경북지사는 자유한국당이 가져갔다. 대구·경북 기초단체장도 대부분 자유한국당 몫이었다. 그나마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 민주당 시장이 당선된 것에 위안을 삼는다.

대구·경북에서도 보수의 뿌리라는 안동은 원래 저항의 도시였다. 안동시 동쪽의 내앞, 무실과 서쪽의 금계, 가일, 오미, 북쪽의 하계, 원촌, 부포, 이웃한 영양군의 주실과 예천군의 금당실까지 모두 10개 마을은 조선 땅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1945년 패망한 일본인이 제 나라로 돌아갈 때 대구를 가장 두려워했다. 귀국길에 대구에서 맞아 죽지나 않을까 하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도 1960년 2월28일 대구 학생운동이 촉발했다. 자유당 정부는 당일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 학생 시위대가 몰려 올 것이 두려워 일요일인데도 등교를 지시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꼴보수 대구시장도 해마다 2월28일엔 동성로의 2·28기념공원에 나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학생들 희생을 기리며 축사한다.

1960년 2월28일 이승만 정권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대구 중고등학생들.   출처:2.28기념사업회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패한 일본군이 서간도를 휩쓸며 독립군 기지를 짓밟은 경신참변 때 살해당한 김동만은 안동 내앞마을 출신이었다. 시신이 너무 참혹해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넋을 놓고 지냈다.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빛나는 공적을 세웠던 한호도 내앞마을 출신이다. 한호는 1934년 일본군 가나이다 사령관을 처단했고 1936년 환인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들은 집과 땅을 모두 팔아 만주로 전 가족이 이주해 독립군 기지를 세웠다.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옥사한 이육사도 안동 원촌마을 출신이다.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를 만든 이병기와 그의 조카 이효정은 안동 부포마을 사람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때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권오설은 ‘안동의 모스크바’였던 가일마을 출신이다. 권오설은 1926년 3·1운동 이후 다시 한반도를 뒤흔든 6·10만세시위를 기획하다가 디데이 사흘을 앞두고 경찰에 체포됐다. 권오설은 혁혁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2005년에서야 독립유공자가 됐다.

안동 오미마을은 의열단 핵심 김재봉의 고향이다. 김재봉은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으니 그 역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 하얼빈을 울린 김만수도 오미마을 출신이다. 김만수는 동지 류기동 최병호와 함께 1924년 4월7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구니요시 고등정탐부장을 처단하려다 출동한 경찰 200여명과 밤새 총을 쏘며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폭탄에 산화했다. 이른바 ‘삼의사 의거’다. 동아일보는 1924년 4월13일자 2면에 ‘200 보병 포위중에도 항복보다는 사유영(死猶榮)’이란 기사로, 조선일보 1924년 4월16일자 ‘독립당원 할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안동에 이웃한 영양군 주실마을은 온 마을 사람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마을 전체가 거부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해방 때까지 주실마을 출신 경찰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누가 대구·경북을 보수의 아성이라 부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