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걱정인데, 기우였으면 좋겠다

[미디어오늘 1156호 사설]

2018-07-01 11:07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1970년대 중반 정부나 기업체의 중동러시에 따라 기자들도 외유할 기회가 생겼다. 중동은 주로 경제부처 출입기자들이 1976년부터 발을 내딛기 시작해 부쩍 외유행렬이 늘었다. 국내 수행출장이 우리 중앙청(현재 세종로정부청사) 기자에게는 기다려지는 낙이며 그만큼 기회가 드물다. 이보다 더 귀한 기회가 바로 외유 기회다. 1973년 5월 김종필 총리의 유럽순방을 앞두고 수행기자가 결정됐다. 나는 지방지라서 빠졌다. 기자실 준회원이었던 나는 엄두도 못 낼 처지였다. 나는 다음번엔 수행하고야 말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나는 기자단 간사에게 “이번(1977년)에 총리가 외유하면 지방신문 대표 1명을 수행기자 명단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1977년 3월 최규하 총리의 외유 얘기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기자단 간사에게 “우리 지방기자들은 뭐냐”며 불평했다. 간절한 소망과 불평이 뒤섞인 감정이 교차했다. 서기원 공보비서관에게 가서 따지면서 “이제는 국력신장을 과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외국출장 가려면 국회로 옮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개인적 불운을 씻기 위해서도 내심 외국행 추진이 올해에는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1979년 12.12 쿠데타때 중앙청에 진입한 탱크. 광화문 앞 중앙청은 권위주의 정권시절 국무총리의 집무공간으로 주요 회의가 열렸다. 지금은 세종로 정부청사로 사용중이다. 

1978년 봄 간신히 해외출장 기회를 잡았다. 최규하 총리의 유럽순방이었다. 두 개 반으로 나눠 1반은 1978년 4월12일, 2반은 26일 출발했다.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 스페인, 이태리 등 총리 순방길이다. 우리는 대한항공 902편 보잉707기를 타고 출발했다. 나는 오른쪽 12번 D좌석에 몸을 맡겼다. 실로 언론계에 투신한 지 14년만의 나들이였다. 1978년 4월21일 우리는 본격적인 사적 순례(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소련에 불시착했다. 관광안내인에게 이 중요한 뉴스를 들을 줄이야 누가 생각했겠나. 순방계획이 어그러질까 불안하기만 했다. 

1978년 4월 21일 아침 사적 순례를 예정대로 했다. 그런데 김성우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이 우리 일행 중 자기회사 박 기자를 데리고 나갔다. 조선일보 김 기자도 나갔다. 이들은 취재차 핀란드 헬싱키로 향했다. 경향신문 문 기자도 함께 갔다. 나는 서울에 전화했다. “외국 통신사에 의존하는 게 효과적이라 취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잘된 셈이었다. 가까스로 유럽 견문취재(관광)를 계속할 수 있었다. 22일엔 KBS 신 기자와 CBS 강 기자도 헬싱키로 갔다. 이제 코리아타임즈 윤 기자, 코리아헤럴드 강 기자, 영남일보 고 기자, 나까지 4명만 남았다. 

1978년 4월23일 우리 4명은 서독에 가서 뒷골목 맥주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처음으로 유럽의 퇴폐현장(사창가)을 보았다. 뒷골목 생태를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라 속옷을 들여다보듯 심부(深部)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요 산교육이다. 암스테르담에서도 운하거리에 집중된 퇴폐현장(사창가)을 통해 그 곳 생태를 보았다.

위 글은 70년대 지방 일간신문 서울 주재기자로 중앙청, 지금의 총리실에 출입했던 기자가 쓴 단행본의 한 대목이다. 이 기자는 책 뒤쪽에 자기 이력을 기록하면서 ‘유럽 5개국 순방 취재-78년’이라고 자랑스럽게 써 놨다. 이 기자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됐을 땐 김종필 국무총리 수행차 부산 동래온천으로 가서 총리 얼굴도 못 보고 술만 진탕 마셨던 취재 뒷얘기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60년대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여러 신문을 거쳐 1985년 학계로 진출해 2003년 교수로 정년퇴직했다. 그는 고별강연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언론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오는 8월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벌써부터 걱정이다. 제발 기우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