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동아일보 3·1운동 1년 장기 연재

[비평] 더 풍부했으면 좋았을 동아일보 3·1운동 연재
1918년부터 파업 급증, 3·1운동 참가자 절반이 농민
서울시 100주년 기념공간 조성사업도 지식인 중심

2018-06-30 12:52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내년 3월1일이면 3·1운동 100주년이다. 동아일보가 지난 3월3일부터 ‘토요기획 -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이름으로 1년짜리 장기 연재기사를 쓰고 있다. 3월3일자 첫 기사는 ‘99년전 2·8독립선언 외쳤던 곳엔 기념푯말 하나 없어’란 제목으로 1919년 2월8일 재일본조선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엔 푯말 하나 없어 “세월이 흐르면 한국인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지워질지 모를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동아일보 3·1운동 1년 연재, 더 풍부했으면

동아일보는 6월30일자 10면에 10번째 연재기사를 ‘日 보도통제 뚫고… 한국 독립운동 소식 마침내 전세계 타전’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첫 문장은 3·1운동 기획단계부터 참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의 회고록 ‘3·1운동 발발의 개략’에서 시작한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탄한 이후 경성에서 처음 겪는 대규모 거리시위였다. 일경(일본경찰)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거리 좌우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동아일보 2018년 6월 30일 10면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지하신문을 제작 배포했던 한글학자 이희승과 상하이에 밀파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목사 현순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6월30일자 기사뿐만 아니다. 그동안 10차례 연재기사에 나온 이들은 이광수, 조소앙, 신규식, 이종일, 손병희 등 대부분 지식인이다.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독립사상 및 운동’에는 3.1운동 피검자가 1만 9525명인데 직업별로는 농업이 55.3%, 학생 9.9%, 상업 8.3%, 무직(다수의 여성) 5.8%, 노비와 날품팔이 3.8%, 각종 기술자 3.1%순이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일제침략 하 한국 36년사’에는 만세운동에 참여자 직업을 농민 58%, 지식인 21%, 상인 11%, 노동자 4%, 자본가 3%, 기타 3%였다.

두 통계는 만세시위 참가자 절반 이상이 가장 억압받던 농민임을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노동자의 시위 참가를 4%로 집계했지만, 조선총독부의 노비와 날품팔이 3.8%, 기술자 3.1%를 합친 6.9%가 당시 새로 등장하던 노동자였다. 당시 전체 인구 2000만명 중 노동자는 15만명으로 0.7%에 불과했지만 만세시위엔 7% 가량 참가했다.

동아일보가 3·1운동 참가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과 노동자의 시각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내년 3월까지 이어질 동아일보 연재기사에 기층세력의 활약도 나왔으면 한다.

지식인 3.1운동만으론 전국적 저항 이끌지 못해

3.1운동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0여년이 지나고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이 드러났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이 땅에도 노동자 숫자가 늘었다. 조선의 공장노동자는 1911년 1만 2000명에서 1919년 4만 2000천명으로 8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었다. 여기에 광산, 토목건설, 운수노동자까지 합치면 15만명에 달했다.

노동쟁의는 1910~1917년 해마다 고작 7~8건이었는데 1918년엔 50건으로 급증하고 파업 참가 노동자도 4,5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조선 노동자는 1918년부터 식민지 당국과 자본의 착취에 본격 저항했다. 그 힘이 3.1운동을 낳았다.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시작은 지식인들이 주도했지만 거리의 폭발적 항쟁은 노동자 농민이 주도해 1919년 8월에 정점에 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만 84건, 8,500명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노동자 중에 가장 먼저 만세시위에 합류한 이들은 용산인쇄소 직원이었다. 용산인쇄소는 용산전자상가 앞 원효로2가 사거리에서 있는 용문시장에 있었다. 용산인쇄소는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각종 문서와 책자를 생산하는 공기업이었다.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명은 1919년 3월 8일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거리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헌병대에 19명이 연행됐다.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명이 1919년 3월 8일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사진은 용산인쇄소 자리에 들어선 용문시장. 용산전자상가 앞 원효로2가 사거리 근처다. ⓒ 독립기념관

다음날 아침 경성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명은 파업과 동시에 만세시위에 나섰다. 동아연초공장은 종로4가 사거리에 있었다. 동아연초도 조선총독부 직영 전매품인 담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이 역시 공기업이었다. 이날엔 전차 기관사와 차장들도 파업에 나섰다.

1919년에 ‘8시간 노동제’ 요구 내걸어

지식인들 만세시위는 휴교령과 투옥으로 석달 뒤 시들었지만 노동자 투쟁은 1919년 7, 8월 최고조에 달했다. 8월 한 달에만 경성에서 26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특히 8월18일 경성전기 파업은 경성 시내를 암흑천지로 만들고 전차운행까지 중단시키는 위력을 떨쳤다. 앞서 3월 만세시위에 동참했던 동아연초 노동자들은 그해 10월 일당 20전 인상, 수당 50% 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 상여금 인상을 내걸고 17일간 파업한 끝에 승리했다. 이 파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8시간 노동제’를 내건 파업이었다.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여명은 1919년 3월 9일 아침 파업과 동시에 만세시위에 합류했다.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담배를 만들던 동아연초공장은 서울 종로구 인의동 112-2번지에 있었다. 만세시위가 격렬했던 종로4가 사거리에서 종묘 입구 쪽이다. ⓒ 독립기념관

조선의 노동자 농민이 거리에서 뜨거운 봄과 여름을 보내던 1919년 8월 대한제국의 외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낸 ‘을사 5적’ 이하영은 서울 용산구 원료로 1가에 대륙고무(주)를 세워 친일관료에서 기업가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대륙고무는 한국 최초 고무공장으로 검정고무신을 생산했다. 이 회사 주주들은 고종의 부마 박영효, 윤치호, 윤치소, 박중양 등 개화파에서 변질한 친일관료들이었다.

만세시위의 기운이 한풀 꺾인 1919년 10월 인촌 김성수는 지금의 영등포역 앞에 경성방직(주)을 세우고 박영효를 초대 사장으로 앉혔다. 경성방직은 이후 경방필백화점을 거쳐 지금은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이 됐다.

1920년 세계적 불황과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식민지 조선에도 실업자가 속출하고 곳곳에서 임금 삭감이 강행됐다. 1920년엔 콜레라가 서울을 강타해 983명이 죽어 노동자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3·1운동으로 각성한 4개 고무공장 노동자 연대파업

불황과 콜레라로 홍역을 치른 서울에선 만세시위로 각성한 노동자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만세시위가 주로 일어났던 인사동 일대 제화공들은 1923년 1월 동맹파업을 벌였다. 파업 이후 이들은 양화직공조합을 만들어 협동조합 방식의 구두 제작을 모색했다.

1923년 7월 3일엔 동대문 일대 4개 고무공장(해동, 뇌구, 경혜, 동양고무) 여성노동자 1,200여명이 임금 삭감에 맞서 공동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사흘째인 5일부터 160여 명의 여성노동자가 광희문 밖 공장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여성노동자들은 경성고무여직공조합을 구성해 연대하고, 같은 날 오후 한성고무와 경성고무 여성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전국에서 파업노동자를 돕는 연대기금이 모였다. 멀리 마산과 일본 오사카에서도 연대기금이 날아왔다. 4개 회사 여공들은 파업 17일째인 7월 19일 노사 교섭에서 내걸었던 요구를 따내고 파업을 끝냈다.

고무4사 연대파업에 들어간 여공들이 1923년 7월 3일 각황사(현재 조계사 옆)에 모여 토론중이다. 토론 중에 카메라 셔터가 터지자 일부 여성노동자가 놀라서 뒤돌아보고 있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5일자)

당시 신문기사엔 1920년대 고무공장 여성노동자의 삶이 잘 드러난다. “직공들이 공장에서 점심을 먹던 중 여직공이 아이를 안고 물을 먹으러 가다가 아이의 손이 우연히 일본인 감독의 얼굴에 닿았다. 이 감독은 주먹으로 어린 아이의 뺨을 때렸고 여직공이 이에 항의하자 감독은 여공을 발로 차고 때렸다. 다른 직공 4~5명이 감독에게 항의하자 감독은 ‘조선 계집 다 죽여도 상관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폭력을 가해 다수의 여공이 부상을 당했다”(동아일보 1926년 11월13일자)

서울시 100주년 기념공간 조성에도 농민·노동자 빠져

서울시가 지난 4월24일  3.1운동 발상지인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탑골공원에 이르는 삼일대로 일대를 역사가 살아 있는 거리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조선일보 2018년 4월25일자 12면) 

조선일보 2018년 4월25일자 12면

서울시는 삼일대로 시작지점인 ①안국역 5번 출구와 ②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나눠 줬던 수운회관 앞 ③당시 각종 집회를 열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④안창호 선생이 세운 서북학회 터 ⑤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 터 ⑥첫 만세시위를 벌인 탑골공원 후문 등 모두 7곳에 시민공간을 내년 3월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조성한다. 

그러나 바로 옆 종묘 인근 동아연초공장 터는 빠졌다. 1919년 3월9일 아침 이 공장 노동자들도 거리시위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