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북한 외교관이 말하는 북한 선전전략과 언론통제

책 ‘3층 서기실의 암호’ 저자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김정일·김정은, 보도사업 문제에 이중적”

2018-07-18 12:08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탈북 2년도 안 돼 내놓은 책 ‘3층 서기실의 암호’(기파랑)가 서점가를 흔들었다. 남북관계가 유례없는 평화국면으로 돌아선 가운데 “북한은 오직 김정은 가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노예사회”라는 책의 핵심 메시지에 호응했다기 보다는 북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베스트셀러의 요건을 갖추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북한이란 통제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앞으로 남북교류에 나설 언론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책에 따르면 통제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은 생활총화다. 자기 검열과 상호 검열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는 것. 또 하나의 핵심은 숙청이다. 북한외교는 숙청으로 단련된다. 북한외교가 강한 이유는 ‘벼랑 끝 외교’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생존을 위한 외교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교 라인이 오래 지속되며 외교관의 전문성이 강화된다. 정권이 바뀐다고 외교라인이 교체되는 여타 대의제민주주의 국가와는 다르다.

▲ 책 '3층 서기실의 암호'. 기파랑.
노동당 3층 서기실도 수십 년 간 이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국가결정에 관여한다. 이곳은 일종의 대통령 비서실인데, 부처 간 협의가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 3층 서기실은 모든 정보가 모여 수십 년 간 쌓인 ‘정보의 곳간’이다. 만약 북한 취재가 자유로워진다면 3층 서기실 직원들은 1급 취재원이 될 것이다. 3층 서기실과 관련해 주성하 동아일보 북한전문기자는 “아마 미디어오늘보다 한국 언론에 대해 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북한의 선전 전략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악의 축으로 규정된 북한은 유럽을 통해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으로 2003년 초 영국 대사관 개설을 시도했다. 이후 영국은 1966년 영국 월드컵 당시 북한의 8강 진출 신화를 다룬 영화 ‘천리마축구단’을 제작했다. 이후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AP통신의 영상부문 계열사 APTN은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평양지국을 개설한 첫 언론사가 됐다. 북한은 APTN에 김일성 탄생 90주년 대규모 집단체조 ‘아리랑’ 독점 중계권을 주기도 했다.

태영호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외국 언론사의 지국 개설이나 외국 기자의 상주 문제는 조선중앙통신사나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관할한다. 두 기관은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의 승인을 받아 상주 허용 신청서를 외무성에 보내야 한다. 이후 외무성 보도국이 ‘최고지도자’에게 보고하고 결재가 떨어지면 허가가 나오는 방식이다. 당시 태영호씨는 APTN의 본사가 런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2006년 평양지국 개설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외국 언론과의 사업을 중시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과거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했고 김정일은 북한이 BBC와 ABC를 장악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는 게 태씨의 주장이다. 김정은의 경우 집권 후 첫 번째 핵실험이 실시된 직후인 2013년 2월 데니스 로드맨을 만났다. 핵실험에 쏠린 부정적 여론을 희석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핵실험은 했지만 김정은 자신은 매우 개방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선전한 셈이었다.

▲ 김정은·데니스 로드맨 만남 관련 KBS 보도화면 갈무리.
그러나 언론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선전효과를 노리기는 쉽지 않다. 태씨는 이 책에서 “김정일이나 김정은은 대외 보도사업 문제에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어느 날은 외교관들에게 주동적으로 외국 언론과 인터뷰나 브리핑을 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홍보하라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외교관들이 임의대로 외국 언론과 접촉해서는 안 되며 사소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꾼다. 보신주의가 횡행하는 환경에서 누가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겠는가”라고 적었다.

한류콘텐츠 단속반 ‘109호’의 의미

책에 따르면 한국의 드라마·영화는 DVD나 USB 형태로 북한 장마당에 들어오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전력사정이 악화돼 TV를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된 북한 주민들에겐 TV를 대체할 영상물이 필요했다. 그 때 중국이 배터리로 DVD나 USB를 재생하는 미디어플레이어 ‘노텔’(NOTEL)을 생산했고 가격도 30달러부터 70달러까지 저렴한 편이어서 북한 가구 대부분이 노텔을 보유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노텔은 정전이 지속돼도 장마당에서 배터리를 구입하면 쓸 수 있다고 한다.

태영호씨는 “북한 사회가 죽어간다는 것은 최근 북한에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며 “현재 방영되는 북한 영화나 드라마는 거의 10여 년 전에 제작된 것이다. 제작해봐야 보는 주민들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0년대 초부터 한국 콘텐츠가 북한으로 밀수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현실이 당국의 선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정은은 집권 후 불순 녹화물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한류 차단을 전문으로 하는 단속반 ‘109호’라는 상설조직을 창설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 나치 독일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 매체와의 접촉을 통제하며 내부 여론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치 역시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순 없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BBC가 2017년 한국어 라디오채널을 개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로 인식했다고 한다. 북한 주민에게 외부 실상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체제를 붕괴시키는 위험요소라는 것. 북한은 BBC에 평양지국을 승인해주겠으니 대북 라디오방송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협상을 벌이다 2016년 4월 북한을 방문한 BBC 취재진 3명을 구금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BBC는 2017년 9월부터 대북라디오방송을 시작했다.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공연 '봄이 온다'를 관람한 뒤 남측 예술단 출연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태영호씨는 “북한주민 맞춤형 콘텐츠로 북한의 민주주의와 개혁개방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라디오와 위성TV 인프라, 와이파이를 포함한 인터넷 이용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태씨는 또한 “독일이 통일 된 것은 동독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서독 TV를 시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과 달리 북한 주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3권 분립, 인권 등에 대한 초보적인 개념조차 없다”며 “충격적이지 않으면서 북한 주민 의식에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곧 북한사회와 마주할 한국 언론인들이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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