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언론노조, 역사적 산별협약 체결

노사동수 공정방송기구, 징계 심의 요구권 부여
유연근무제, 불가피한 경우에만 노사 합의로 시행
하반기 내 비정규직 포함 고용구조 실태조사 실시

2018-09-03 09:44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과 KBS·MBC·SBS·EBS 등 지상파4사가 산별협약을 맺었다. 산별협약은 언론노조가 2000년 산별노조로 전환한 이후 18년 만의 첫걸음이다. 이번 협약은 공정방송투쟁에 앞장섰던 최승호 PD와 양승동 PD가 MBC·KBS사장으로 취임한 뒤 박정훈 SBS 사장까지 산별교섭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급물살을 탔다. 이번 협약은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 등에도 ‘업계 표준’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노사는 지난 6월12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공정방송 △제작환경 개선 △방송 공공성 강화와 진흥 3개 분과 14명의 교섭위원이 17차례의 교섭을 통해 8월31일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이들은 3일 오후 1시30분 MBC에서 협약 조인식을 갖는다. 언론노조는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지역 및 중소방송, 신문·뉴스통신, 출판 등 미디어산업의 다양한 업종으로 공동교섭, 산별협약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지난 6월12일 지상파-언론노조 산별교섭 상견례 모습. ⓒ언론노조
지상파-언론노조의 역사적인 산별협약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공정방송’ 장치다. 지상파방송 산별협약은 7조2항에서 ‘사용자와 조합은 보도 편성 제작 책임자에 대한 임명과 평가 등에 제작 종사자의 의견이 반드시 반영될 수 있는 절차와 방법을 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임명동의제 또는 중간평가제 같은 제도적 장치를 명문화한 것으로 공정방송을 위한 실질적 조치에 해당한다.

8조1항에선 ‘사용자와 조합은 공정방송을 위해 노-사 동수의 위원으로 구성된 공정방송기구를 설치하며, 구체적 구성 방법은 각 사별 상황에 맞게 결정한다’고 명시했다. 8조3항에 따르면 공정방송기구는 보도 편성 제작과 관련한 모든 상황을 논의할 수 있으며 제작 자율성을 침해하거나 방송 강령과 프로그램 제작준칙 등을 위반한 일이 있는지를 심사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앞선 7조2항보다 강력한 공정방송 장치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공정방송기구는 공정방송을 저해한 구성원에게 징계 심의를 요구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이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이같은 조항은 경영진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무력화될 수 있는 공정방송기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운영과 권한을 명확히 했다. 언론노조는 “노사동수로 구성되는 이 기구는 공정방송을 저해한 구성원에 대해 징계 심의 요구권을 부여해 부당한 지시나 압력을 방지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2019년 7월1일 시행되는 주당 최대 52시간 노동을 앞두고 제작환경 개선방안도 노사가 큰 틀에서 합의했다. 3장 11조1항엔 ‘사용자가 노동시간 규제와 법 개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명시해 법제도의 후퇴를 막았고, 2항엔 ‘노동시간 제도 개선으로 인해 조합원의 임금이 하락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명시했다. 조합원이 가장 우려하는 임금하락을 봉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3항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불필요한 업무와 관행을 없애고, 방송 제작 시스템 개선, 인프라 확충, 적정 인력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문구는 ‘상시·지속 업무 인력 충원 시에는 정규직 채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으로, 주당 최대 52시간을 맞추기 위해 경영진이 비정규직을 양산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대목이다. 4항에선 ‘노동시간 단축에 있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13조엔 장시간 제작 분야 특별대책으로 드라마와 예능 분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합의사항이 등장한다. 1항에선 ‘스태프들의 1일 노동 시간은 최대 12시간을 원칙으로 하고, 불가피하게 촬영을 연장할 경우 15시간을 초과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근로일 종료 후에는 다음 근로일 개시 전까지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장한다’고 명시했다. 2항에선 ‘방송사 책임자, 제작사 대표는 스태프와 촬영시간, 휴게시간, 식사시간, 휴차 등 제작환경에 대해 충분히 협의해 제작현장을 운용한다’고 명시했다.

14조엔 ‘불가피하게 유연근무제도를 도입해야 할 경우, 방송사별 노사 합의를 거친 후 시행한다’고 명시했다. 앞서 언론노조는 유연근무제 도입에 반대 입장이었으나, 유연근무제가 없을 경우 △효율성이 떨어지고 △콘텐츠 질이 하락할 수 있고 △오히려 업무 스트레스가 늘어날 수 있다는 내부 조합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비춰진다. 대신 언론노조는 유연근무제의 ‘불가피성’을 문구에 삽입해 ‘부당한 남용’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15조에는 올해 하반기 내 고용구조 실태조사를 실시하기로 명시했다. 1항에 따르면 ‘조사 대상은 방송사 직접고용 계약직(무기계약직 포함)과 직접계약 프리랜서, 파견 및 용역, 도급 노동자들로 하며 연구 내용에는 개선방안까지 포함한다’고 명시했다. 이 같은 실태조사는 사실상 방송업계에서 처음 이뤄지는 것으로, 지금껏 불안정노동에 시달려왔던 이름 없는 방송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사는 이번 협약에서 공동으로 △방송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 지원 △공정 경쟁에 반하는 차별규제 해소와 특정 사업자의 특혜 회수 및 조정 △지상파 방송의 공적 서비스 강화를 위한 제도개선을 국회 및 정부부처에 전달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종합편성채널 의무전송 규정을 보도전문채널과 동일하게 선택적 의무전송으로 개정하거나 폐지해야 하며, 종편 사업자가 유료방송사업자와 협의를 통해 채널번호 지정 및 콘텐츠 제공대가가 산정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실질적으로 언론 기능을 수행하는 대형 포털·페이스북·유튜브에게 공적 기금의 납부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