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브리너와 ‘미스터 션샤인’

[미디어오늘 1166호 사설]

2018-09-08 09:33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지난 2일 ‘미스터 션샤인’ 18회는 1903년 대한제국이 주 무대였다. 드라마에 일본과 미국의 각축전은 나오지만 러시아는 미미하다. 러시아는 1895년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 승전국 일본을 누를 만큼 막강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지기 전까지 10년 남짓 이 땅에서 러시아는 꽤 힘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민영환조차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친러파였다. 구한말 러시아 하면 베베르 공사를 떠올린다. 베베르는 1884년 12월 친일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이듬해 이 땅에 러시아공사로 왔다.

베베르는 오랜 청의 내정간섭과 성장하는 친일파를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중을 파고들어 현란한 외교술로 조선 조정에 친러파를 키웠다. 이범진, 민영환, 윤치호, 이완용이 그들이다. 일본은 친러내각을 무너뜨리고 1895년 10월 황후를 시해하고 김홍집 친일내각을 세운다.

친일내각 넉 달 뒤 베베르 공사는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를 동원해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날 새벽 6시께 고종과 세자는 궁녀의 가마에 타고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들었다. 문화재청은 아관파천 길을 ‘고종의 길’로 이름지어 오는 10월부터 개통한다. 고작 120m 길을 뚫는데 122년이 걸렸다. 중간에 미 대사관저 땅이 가로막아서다.

▲ 19세기 즈음 대한제국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은 김홍집 친일내각을 해체하고 이범진, 이완용 중심의 친러내각을 세웠다. 아관파천 1년 동안 러시아는 조선의 각종 이권을 챙겼다. 러시아는 함경도 일대 광산 채굴권과 압록강과 울릉도 산림 벌채권을 챙겼다. 러시아가 챙긴 울릉도와 압록강 일대 200만 에이커의 광대한 산림 벌채권은 단순한 나무베기 이상이었다. 러시아는 압록강 조중 국경선과 일본과 가까운 울릉도에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압록강 일대 벌채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을 하던 스위스계 러시아인 줄리어스 브리너가 맡았다. 브리너는 조선인을 노역에 반강제 동원해 가혹하게 다뤘다. 사람 몸에 밧줄을 걸어 목재를 끌게 해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 나무베기를 넘어선 군사기지 구축은 결국 러일전쟁의 불씨가 됐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브리너는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끌고와 계속 작업에 동원했다.

이 브리너가 바로 배우 율 브리너(1920~1985)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브리너 집안은 떼돈을 벌었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빈털터리가 됐고, 율 브리너는 가난한 유년을 보냈다.

▲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 한 명인 이완용
1903년의 ‘미스터 션샤인’엔 누가 봐도 이완용인 이완익이 중인 출신의 천박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이완용은 뿌리 깊은 노론 양반이었다. 이완익이 유진 초이(이병헌)와 각을 세우는 것도 황망하다. 이완용은 1895년 민황후 시해 때 알렌 공사 주선으로 미국 공사관에 피신할 정도로 친미파였다. 이완용은 1896년 7월 독립협회 창립 때 위원장으로 추대돼 독립문 건설을 주창하면서 “조선이 독립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유럽의 폴란드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다.

브리너에게 끌려간 조선인처럼 미스터 션샤인 제작 스태프들도 여느 드라마처럼 살인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는 씁쓸한 소식이다. 멀쩡한 사람들 피를 짜서 억지로 만드는 ‘감동’이 얼마나 오래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