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사는 미얀마를 왜 버마로 불렀을까

[아침신문 솎아보기]
군부독재의 오랜 그늘에 갇힌 슬픈 버마 현대사,
제국주의 영국 몰아내려 일본 제국주의 이용,
조선일보 초대 남북사무소장 천해성 차관 유력

2018-09-06 07:55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미얀마 법원은 로힝야족 학살을 취재하던 미얀마 국적의 로이터 통신 기자 2명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미얀마 국가인권위원회는 5일 두 기자의 중형 선고에 “특별히 논평할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화신으로 1991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국가자문 겸 외무장관으로 있는 미얀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외신들은 노벨상 박탈을 주장하기도 했다.

급기야 투옥된 두 기자의 아내가 4일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한겨레신문은 이 소식을 6일자 11면에 ‘로힝야족 취재기자 중형에 수치 침묵…국제사회 비난’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 한겨레 11면

미얀마는 원래 ‘버마’였다. 제3세계 나라가 대부분 그렇듯 버마 민중도 오랜 민족해방 투쟁을 벌였다. 1886년 제국주의 영국은 인도인 지주를 이용해 버마 농민을 지배하는 식민지배정책을 펼쳤다. 영국은 인구 70%의 버마족과 수 십 개의 소수민족간 대립을 조장했다.

군부독재의 오랜 그늘에 갇힌 슬픈 버마 현대사

1930년대 타킨당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이 드셌다. 영국 식민지 버마에 군침을 흘리던 일본 제국주의의 공작이 시작됐다. 일본은 타킨당의 민족해방 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타킨당도 해방을 위해선 기술과 무기가 필요했다. 1940~1941년 사이 30명의 소수정예 타킨 당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는다. 이른바 ‘30인의 지사’다. 버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웅산(아웅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와 네윈도 이때 함께 갔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버마로 진격해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버마 민중에게 바뀐 건 없었다. 지배자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꿨을 뿐이다. 속았다고 느낀 타킨 당은 다시 영국군과 연합해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렸다. 결국 일본을 물리쳤다. 아웅산과 네윈 장군은 1948년 1월 영국연방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 조선일보 20면

그러나 권력은 나눠 가질 수 없는 법. 1962년 3월 2일 새벽, 네윈 장군이 선수를 쳤다. 네윈은 ‘극히 험악한 상태에 빠진 국가 정세를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결행했다. 네윈, 세인르윈, 소우 마웅, 탄쉐로 이어지는 버마 54년 군사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선한 의지로 시작한 네윈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쿠바 혁명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박정희의 5.16 군부 쿠데타의 길을 따랐다.

둘 다 민중으로부터 추앙받았던 아웅산과 네윈은 대를 이어 원수가 됐다. 마치 막판의 이승만과 김구의 차이만큼 벌어진 두 사람 눈엔 민중은 보이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타킨당 민족주의 세력의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중이 없는 지식인들만의 독립은 종잇장처럼 빈약했다. 제국주의 영국을 내몰려고 제국주의 일본을 끌어들이는 순간 버마의 미래는 엉망으로 꼬여갔다.

제국주의 영국 몰아내려 일본 제국주의 이용

쿠데타에 성공한 네윈의 사회주의 계획당은 버마내 외국 자본을 모두 국유화했다. 밖으로는 어떤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은 엄정 중립외교 노선을 택했다. 혼란에 시달리던 버마 민중들은 네윈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는 한때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력갱생 모델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사실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1974년 민정 이양이 이뤄졌지만 군부 지배는 변함없었다. 네윈은 각종 정보기구를 강화해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균형 있는 외교정책으로 주권을 지켜냈던 초기 업적은 사라지고 심각한 경제정체를 낳았다.

버마 민중들은 1988년 가을 네윈과 그 후계자인 세인르윈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다. 3천명이 피살된 1988년의 피바람에도 군부는 건재했다. 아웅산의 딸 수치 여사는 고립된채 이런 군부와 싸웠지만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왜 민중을 믿을 수 없었으니. 결국 수치는 2016년 군부와 타협해 국가자문 겸 외무장관이란 직책을 받아들이고 국가권력을 양분했다. 군부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윈의 군부는 국가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고 수도의 이름 랑군도 양곤으로 바꿨지만 저항시절 내내 수치는 미얀마와 랑군로 불렀다. 그러나 권력을 분점하고부터 수치는 미얀마와 양곤으로 불러도 좋다고 했다.

어정쩡한 권력분점 때문에 수치는 최근 벌어진 로힝야족 학살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얼마의 피를 먹어야 랑군이 제 이름을 찾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버마의 수도 랑군은 ‘전쟁의 끝’이라는 뜻이다. 다시는 지긋지긋한 피의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버마 민중의 뜻이 담겼다.

지난 4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미얀마 로힝야족 인종청소 수준의 학살에 대책을 묻자 “버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국제사회와 공조해 해결해 나가겠다”고 답했다. 헤일리 미국 대사는 이 자리에서 무려 6번이나 미얀마 대신 ‘버마’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6일자 20면에 ‘헤일리는 왜 미얀마를 버마로 불렀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 어제 이어 오늘도 단독, 초대 남북사무소장 천해성

조선일보는 어제 5일자 신문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에 군 검찰 출신의 최강욱(50·사진) 변호사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단독 보도했다. 어제 아침신문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낮 1시쯤 인터넷판에 먼저 기사를 올렸다.

▲ 조선일보 3면

조선일보는 6일자 3면에도 ‘초대 남북사무소장에 천해성 (통일부) 차관 유력’이라는 제목으로 한발 앞서 보도했다. 남북 연락사무소 관련 보도는 이미 여러 차례 나왔지만 대부분 개소 시기를 둘러싼 한미 갈등을 주로 다뤘다. 조선일보도 지난달 우리 정부가 조속한 개소식을 추진하는데 미국은 대북제재 위반이라는 입장이라 양측이 갈등한다고 보도했다.

국민일보는 6일자 3면에 ‘남북 연락사무소 정상회담 前 개소’라는 제목으로 개소 시기에 집중했다. 국민일보는 이 기사에서 초대 소장을 차관급이 맡게 될 것이라고만 보도했는데, 조선일보는 그가 천해성 통일부 차관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100% 자신은 없었든지 기사 제목에 ‘유력’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 국민일보 3면

이처럼 조선일보는 사람 취재에 능하다. 국정농단 사태 때도 조선일보는 한겨레신문보다 몇 달이나 면저 최순실을 만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조선일보는 사람의 자리 이동을 누구보다 발빠르게 취재하지만, 그 소중한 정보를 대부분 집권여당의 ‘캠코더’ 인사를 비난하는 지렛대로만 사용한다. 조선일보가 명명한 ‘캠코더’는 문재인 대선캠프와 더불어민주당 출신을 발탁하는 코더 인사를 뜻한다.

문재인 정부가 감옥에 있는 최순실이나 김종 차관을 문화부 장관에 앉힐 순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에도 마땅한 인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대선캠프 출신과 민주당 인사를 발탁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다. 조선일보는 법조인이 필요한 자리에도 ‘민변’ 출신만 가득하다고 연일 비난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