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방송 사수를 기치로 내건 MBC 노동조합 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대. 현 MBC를 망가뜨렸다는 평가를 받는 전·현직 경영진들도 조합원 또는 노조 간부로 파업과 집회에 참여했다. 김재철 전 사장을 포함한 MBC 간부들도 한때는 권력의 언론장악에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들. 그때 그들은 수십 년이 지나 자신들이 언론장악의 주체로 오명을 남기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2012년 170일 MBC 파업 이전까지 최장기 파업은 1992년 50일 파업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북한 회담 대표들 사기를 북돋울 수 있다는 이유로, 1990년 9월 우루과이 라운드를 비판적으로 다룬 PD수첩 ‘농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불방됐다. 이에 항의한 노조 간부가 해고되면서 MBC 노사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MBC는 1992년 5월 노사 교섭에서 국장 추천제, 공정방송협의회 등 노조의 공정방송 조항 요구를 무시했고 노조와 합의없이 인상된 임금을 지급해 MBC 노조는 그해 9월1일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노조위원장 직무대행으로 구속까지 경험한 이완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정국이 변하면서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며 “이전에는 회사와 합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정치적 상황이 달라진 그때부터 노조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다”고 말했다.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가 MBC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가 MBC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사진=문화방송 노조 자료사진
1992년 10월2일에는 공권력이 MBC 사옥에 투입됐다. 전경 8개 중대 1000여 명은 여의도 MBC본사를 에워싸며 MBC 노동조합을 압박했다. 5개 중대 600여 명은 사내로 들어와 노동조합과 대치했다. 그 사이 경찰은 MBC가 쟁의주도 혐의로 고소한 노조 간부 11명을 포함해 조합원 200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JTBC ‘뉴스룸’ 앵커로 유명한 손석희 아나운서(당시 직책 노조 대외협력위원회 부간사), 박근혜 정부에서 MBC 사장을 지낸 김종국 전 사장(보도부문 부위원장)이 노조 간부로 함께 연행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재철 전 사장과 이진숙 대전 MBC 사장도 당시 보도국 조합원으로 거리에서 파업 선전물을 돌렸다. 2년차 기자였던 박용찬 논설위원실장도 공정방송 구호를 외쳤다. 2012년 파업 과정에서 최승호 전 MBC PD와 박성제 전 기자를 별다른 “근거 없이 해고”했다고 실토한 백종문 부사장은 1996년 MBC 노조 편성제작부문 부위원장을 맡는 등 노동조합 집행부로 활동했다.

이처럼 방송 장악에 앞장선 MBC 경영진 대다수는 과거 조합 활동 경험이 있다. 노동조합이 권력 개입을 차단해 확보한 제작 자율성을 누리던 그들은 지난 9년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부역하며 선후배 동료들을 탄압해왔다. 이 때문에 조합 활동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을까. 이진숙 사장은 2014년 MBC 파업 관련 재판에서 1992년 파업 참여에 대해 “그때 세계관과 지금 가진 세계관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 이진숙 대전 MBC 사장이 평기자 시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 이진숙 대전 MBC 사장이 평기자 시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최승호 전 PD는 “MBC 간부들이 과거 공정방송에 강한 열망이 있어서 파업과 집회에 참여했다기보다 MBC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한 일환으로 노조 운동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완기 이사는 “김재철, 안광한, 김장겸 등 MBC 간부 가운데 조합원이 아닌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이 이사는 간부들의 변절에 대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라고 말하면서도 “안광한·김재철 전 사장은 보수적 인사이긴 했지만 지금과 그때 당시 인식은 참 많이 다르다”고 술회했다. 수구적 행보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 박근혜의 언론장악에 부역하려면 극우·보수 세력 코드에 맞출 수밖에 없고 MBC 경영진이 보수 정권의 성향을 수년간 체화한 결과, 지금의 MBC 보도·프로그램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권력의 언론장악을 저지할 수 있는 핵심은 노동조합이 될 수밖에 없다. 1992년 파업에 노조 민실위 간사로 참여한 정찬형 tbs대표는 “지난 9년간 보수 정권의 엄청난 탄압에도 언론노조 MBC본부가 있었기에 구성원들이 버틸 수 있었다”며 “노동조합 활동은 존중받아야 하고 또 복원돼야 한다. 한국 사회 부조리를 제거하고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던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말할 수 없는 MBC 기획 1-①] 시민의 희망이었던 MBC, 시민의 절망이 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