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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 씨앗은 동아일보 기사였다

[프레임전쟁] 2화 찬탁은 없었다, 반탁운동은 반공운동의 뿌리·친일파는 반공프레임 덕분에 애국자로

2017년 04월 21일(금)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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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기사는 거짓이었다. 12월16일 모스크바에서 소련·미국·영국 3국외상이 만나 조선 문제를 논의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전하는 해당 보도는 실제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소련이 제안한 것처럼 왜곡했다.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해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해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관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해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자 1면기사
▲ 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자 1면기사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는 한국 언론사(史)에서 좌우이념이 대립한 최초의 사건이다. 동아일보는 당시 친일파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핵심 김성수가 창간해,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었고 ‘한민당 기관지’로 불렸다.

한국인들은 신탁통치를 ‘제2의 식민지’로 생각해 격렬히 반대했다. 반탁열풍은 시위·동맹휴학 등 대중운동으로 확대됐다. “전 민족이 투쟁하자”(김구), “전국이 결의 표명”(이승만), “최후까지 투쟁하자”(송진우) 등 성명서가 쏟아졌고,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했다. 자연스럽게 반탁운동은 신탁통치를 제안했다고 알려진 소련에 적대적인 성격을 보였다.

실제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은 동아일보 보도와 달랐다. 신탁통치안은 소련이 아닌 미국의 구상이었다.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한국민은 40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2년 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는 소련·미국·중국 등에 의해 20~30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루즈벨트 사망 이후 대통령이 된 트루만은 신탁통치에 소련 영향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소련은 미국 제안에 대해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는 입장이었다.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조선의 독립민주정부 수립이었고, 이를 위한 신탁통치가 논의됐다. 다만 3상회의 결정에 신탁통치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신탁통치가 소련이 제안한 게 아니라 미국이 제안했다는 사실과 신탁통치의 목적이 제2의 식민지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달돼야 했다. 합의문 1항이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위한 “임시적인 조선민주정부 수립”이다. 이를 위해 2항에서 “남조선의 미군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들로 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그 위원회는 조선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신탁통치 내용이 담긴 3항 “조선 독립의 달성을 위해 협력·원조할 수 있는 방책 작성”은 부수적이었다.

반탁운동 확산, 친일파는 애국자·좌익은 매국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건 ‘조선의 민주적 독립정부 건립’을 지지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3상회의 결정을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로 왜곡하면서 ‘3상회의 결정지지’가 ‘찬탁’으로 변질됐다.

▲ 해방 이후 박헌영(왼쪽)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당수를 맡았다. 이 사진은 반공서적에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로 묘사되며 많이 실렸다.
▲ 해방 이후 박헌영(왼쪽)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당수를 맡았다. 이 사진은 반공서적에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로 묘사되며 많이 실렸다.

좌익세력은 사실을 파악하는데 우선했다. 국내에는 30일부터 3상회의 결과가 보도됐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 선전국장 김오성에게 “이번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것은 논리상으로 따지면 임시정부를 세우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소”라며 “원색적인 감정은 눌러두고 냉철해야지, 임시정부 수립에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요”라고 말했다. 46년 1월3일 좌익 최대세력인 조선공산당은 ‘3상회의 결정지지’ 입장을 밝혔다.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은 ‘3상회의 결정’을 곧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로 봤기 때문에 좌익을 ‘찬탁세력’으로 몰았다. ‘찬탁’표현이 처음 나온 건 1월4일, 한민당은 ‘조선공산당이 반탁 대신 신탁통치를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좌익이 찬탁을 주장하지 않은 사실은 1월7일 한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이 모여 ‘자주독립과 민주정부 수립’에 동의한 ‘4당 코뮤니케’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1월7일 이승만이 “탁치(신탁통치)가 강요된다면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우리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놓은 격이 될 것”이라며 반탁입장을 밝히자, 8일 한민당은 ‘4당 코뮤니케’를 번복했다. 앞서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동아일보 사장)가 3상협정안을 확인하고 이를 지지하자 45년 12월30일 새벽 한현우·유근배 등에게 암살당한 사건도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이 마비된 시기였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 장택상, 조병옥 등은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해방 직후 가장 중요한 이슈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미군정이 실시한 조사에서 서울시민이 선호하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로 나타났다. 주로 좌익이 진정성 있게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열세에 놓인 우익, 특히 친일파들은 동아일보 왜곡보도로 분위기를 뒤집었다.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은 ‘반탁 프레임’으로 바뀌었다. ‘반탁=반소=반공=애국’과 ‘찬탁=친소=용공=매국’으로 구분됐다.

왜곡보도의 배후세력은

동아일보 왜곡보도 출처는 ‘워싱턴 25일발 합동’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조선에 대한 결정’이 공식 발표된 시각은 12월28일 정오, 한국시각 28일 오후 6시, 워싱턴 시각 28일 오전 4시였다. 주한미군사령부가 3상회의 결과를 워싱턴에서 통보받은 시각은 29일 오후였다. 동아일보는 공식발표 전에 이런 중대한 내용을 잘못 보도한 것이다.

미군정의 ‘신탁통치’라는 보고서에서 동아일보 기사 출처로 지목한 곳은 ‘합동통신사’, ‘성조기’, ‘태평양성조기’였다. 동아시아 미군들을 상대로 도쿄에서 매일 발행된 ‘태평양성조기’ 27일자 내용이 동아일보 왜곡보도와 내용이 똑같다. 필자는 UP통신의 랄프 헤인젠 기자였다. 헤인젠 기자는 30년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했고, 동아시아와 별 인연이 없었다. 동료들 사이에선 ‘악명 높은 날조전문가’로 평가받았다.

정리하면 3상회의 공식 발표 이전에 신뢰가 떨어지는 필자가 쓴 도쿄의 ‘태평양성조기’에 실린 글이 하루 만에 ‘합동통신사’를 거쳐 서울의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합동통신은 일제강점기 ‘도메인통신’을 미군정이 1945년 11월에 접수해 합병 등을 거친 곳이다. 합동통신 주간 김동성은 이승만 정권 초대 공보처장을 맡을 정도로 이승만과 친했다. 이승만과 김동성의 힘만으로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에 왜곡보도를 낼 순 없다. 일본과 한국의 여론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곳은 미군정(주한미군)과 맥아더의 도쿄 극동군사령부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 내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은 반소·반공 여론이 필요했다. 일본 항복 이전부터 소련이 한반도 북쪽에 주둔했고, 미군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선을 그었다. 38선 이남 민심마저 좌익에 우호적이었고, 신탁통치 반대나 친일청산 요구가 거셌다. 미국 본토 정부에 비해 태평양 주둔 미군은 남한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신탁통치가 남한 정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신탁통치 계획 수정을 미 국무부에 요청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

▲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이후 반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이후 반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미군정청 공보부는 12월29일자 ‘정계동향’에 “미국이 즉시 독립을 원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합동통신사(KPP)의 기사배포가 강력한 반소감정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왜곡보도로 남한 내 우익과 미군정은 반소·반공을 고리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박헌영 기자회견 왜곡, 미군정의 좌익 죽이기

뉴욕타임즈 통신원 리처드 존스톤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왜곡한 건 ‘반탁=반소·반공’ 프레임을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다.

1946년 1월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들과 영어로 소련의 신탁통치와 소비에트 연방 가입가능성 등을 묻는 기자회견을 했다. 존스톤은 박헌영이 소련 신탁통치를 찬성했고, 소련 가입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고 기록했다. 뉴욕타임즈에 실리지 않은 이 내용은 열흘 뒤인 1월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알려졌고, 16일 동아일보·대동신문 등 우익 신문들이 인용하며 박헌영을 공격했다.

17일 조선공산당은 존스톤의 왜곡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8일 존스톤은 회견 취소를 원한다면 뉴욕타임즈에 항의하라고 발언했다. 당시 뉴욕타임즈에 박헌영 인터뷰가 실리지 않은 사실을 국내에서 확인하긴 쉽지 않은 점을 악용해 거짓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날 미군정은 존스톤 기사에 왜곡이 없다고 발표했고, 조선공산당의 존스톤 추방요청을 거절했다. 박헌영 기자회견 직후 미군정의 하지 장군이 존스톤의 메모에 대해 흥미롭다고 주의를 환기한 사실은 ‘박헌영-존스톤 사건’ 배후가 미군정이라는 의심에 무게를 더한다.

박헌영 같이 노회한 정치가가 기자들 앞에서 조선공산당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미군정의 여론공작 결과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현상금 30만 엔을 걸었고, 박헌영은 좌익들 사이에서도 ‘구제불능의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소련의 반격, 미군정 여론통제

소련은 남한 내 상황을 파악하고 46년 1월22일 ‘타스통신’을 통해 ‘미군정이 남한 내 반소선전을 허용하고 3상회의 결정 반대를 자극한다’는 평양발 급보를 냈다. 미국 정부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고, 맥아더 장군 대변인만 타스통신을 비난했다.

타스통신은 24일자로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한 사실을 공개했다. 미군정이 남한 내 언론을 통제해 타스통신 보도가 전달되지 않자,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 스티코프는 26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타스통신 보도 전문을 발표했다. 그때도 미국 정부가 아무런 대응을 못한 것은 미군정이 반탁·반소 선전을 허용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한미수뇌들. 왼쪽부터 미진주군사령관 하지, 태평양미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연합뉴스
▲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한미수뇌들. 왼쪽부터 미진주군사령관 하지, 태평양미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연합뉴스

미군정의 언론통제로 좌익의 목소리는 묻혔다. ‘해방일보’는 46년 4월29일 박헌영을 인용해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는 식민지 민족해방과 독립을 보장하는 유일하게 옳은 국제적 원칙”이라고 보도했고, ‘노력인민’은 47년 11월20일 “파쇼희랍화하려는 조국을 구하자”라는 글에서 3상회의를 “조선민족을 위해 참으로 유리한 진보적 결정”이라고 했다.

좌익 언론을 보면 미군정이 ‘3상회의지지’를 어떻게 ‘찬탁’으로 몰아 한국인을 탄압했는지 알 수 있다.

46년 1월27일 3상회의를 실현하기 위해 입국한 미소대표단 환영대회에 악기를 가지고 나간 구실로 전남 종연방직 공장장은 노조간부 손만기를 해고했다. 이곳 사장은 미군정의 관리였다.

2월 경성 철도노동자들이 3상회의 실천을 위해 미소대표단 환영회에 참여하려했다. 이를 간부들이 강제로 막았는데 당시 철도국장이 미국인이었다. 노동자들이 서울운동장으로 향하자 정체불명의 테러단이 습격했고, 철도노조간부 김재완·방준표·박성순·임종한 등이 검거돼 전원 실형을 선고받았다.

13일자 해방일보는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미소대표단을 환영하자는 시민대회에 참여하려는 우리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철도국장(미국인)은 참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테러범은 왜 석방하고 테러받은 우리들은 무슨 이유로 구금하는가”라며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길행 간부 등이 지난 1월12일 반탁데모 때 폭력으로 우리를 강요 참여케 했음에도 그들은 어찌하여 미군이 단호 처단치 않는가”라고 비판했다. 미군정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국민을 ‘찬탁’세력으로 몰아 폭력을 이용해 해산시킨 내용이다.

반공으로 갈라진 좌우

▲ 1945년12월과 46년1월 신탁통치, 3상회의 관련보도. 자료출처=김영희, 미군정기 신문의 보도경향
▲ 1945년12월과 46년1월 신탁통치, 3상회의 관련보도. 자료출처=김영희, 미군정기 신문의 보도경향

1945년 12월~46년 1월 두 달 간 3상회의·신탁통치 관련 보도 중 동아일보는 다른 자유주의 신문들에 비해 신탁반대 논평·시위 관련보도 비중이 높았다. 동아일보는 신탁반대 보도비율이 47.6%로 조선일보(31.9%)·자유신문(27.1%)·중앙신문(26.4%) 등에 비해 높았다. 반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내용은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3상회의·신탁통치에 대한 정당관련 기사 역시 우익정당 반응은 64건을 보도했지만 좌익정당 반응은 11건밖에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46년 5월11일자 사설에서 소련을 “우리에게 탁치를 강요하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등 3상회의 결정내용을 파악한 이후에도 반공프레임을 강화했다.

미군정의 여론조작결과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이 분열됐다. 좌우익은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3상결정기념식과 반탁기념식을 열었다. 3000여명의 3상결정지지자 중 일부는 반탁을 외친 50여명에게 기습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좌우대립이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세달 뒤인 6월3일 정읍에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바라는 중대발언으로 패전·전범국인 일본 대신 한반도가 남북으로 찢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승만은 1919년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요청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인물이다. 그가 해방 이후에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유는 미군정의 뜻대로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들은 ‘3상회의 결정’의 사실관계도 무시한 채 반탁을 외치며 이승만과 친일파에게 이용당했다.

45년 8월15일 일본 항복이후 4개월이 지나서야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3상회의가 열렸다. 해방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동아일보 왜곡보도로 좌우익 갈등이 극심해졌다. 3상회의 결정을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적극적으로 만나 조선의 민주독립정부 수립을 준비해야 했다.

반탁운동은 46년 3월 1차, 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결국 같은해 9월17일 한국의 독립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됐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48년 5월10일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됐다.

▲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절차를 토의하는 양국대표들 왼쪽은 미국대표 하지 중장 오른쪽은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
▲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절차를 토의하는 양국대표들 왼쪽은 미국대표 하지 중장 오른쪽은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

같은해 12월 이승만 정부는 사실상 좌익 숙청이 목적인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분단정부 수립이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해방 이후로 반탁운동과 반공운동에 우리 전 민족이 목숨을 내놓고 싸워서 태산 같은 방해를 다 물리치고 오늘까지 성공하여 온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무산과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숙청·국민보도연맹 학살 등은 동아일보 왜곡보도 이후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정보를 조작하고, 그 정보를 믿은 대중의 행동결과만 역사적 사실로 남는 이 무서운 상황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다.

※ 참고문헌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박태균, 반탁은 있었지만 찬탁은 없었다
윤해동, 반탁운동은 분단·단정노선이다
김영희, 미군정기 신문의 보도 경향-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의정서 보도를 중심으로
정용욱, 역비논단-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

<프레임전쟁> 연재목차

1화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2화 해방 이후 찬탁 대 반탁 갈등

뉴스의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의제(어젠다·agenda)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여과를 거친 의제는 복잡한 이슈를 찬반 양자택일 구조로 형성하고 여론이 기술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만 몰두하게 했다. 또한 언론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할 힘조차 미화시켜 역사적 국면마다 흉기로 둔갑하곤 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미디어오늘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체제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史에서 언론·국가·자본권력이 첨예하게 갈등하거나 야합했던 주요한 사회적 모멘텀(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거나 바꾸는 장면)을 제공했던 사건들을 프레임(개념 틀) 전쟁이란 관점에서 14회에 걸쳐 연속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을 성찰하고 되짚어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겠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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