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집권 기간 언론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당사자들이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보도를 없애겠다는 둥 이런 망발을 일삼는 후보를 앞세우면서 방송국에 와서 이렇게 항의를 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입니까.”

4일 오전 SBS의 ‘세월호 인양 고의 지연 의혹’ 보도 삭제 논란과 관련해 ‘민주당발 언론탄압’이라며 SBS를 항의 방문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향해 윤창현 전국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이렇게 일갈했다.

문제의 발단은 부실한 취재와 신빙성이 떨어지는 익명 취재원의 녹취 발언을 근거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인양을 두고 정치적 거래를 한 것처럼 보도한 2일자 SBS 뉴스였다.

SBS 보도가 나간 후 문재인 후보 측을 비롯해 세월호 유가족 등 항의가 빗발치자 SBS는 해당 기사를 삭제했다. 지상파 방송에서 이미 보도된 기사를 삭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성준 SBS 보도본부장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사실과 다른 의혹과 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보도 책임자인 내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고 해명했다.

김성준 SBS 보도본부장은 지난 3일 SBS ‘8뉴스’ 첫머리에서 세월호 인양 지연 의혹 보도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했다.
김성준 SBS 보도본부장은 지난 3일 SBS ‘8뉴스’ 첫머리에서 세월호 인양 지연 의혹 보도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했다.
김 본부장은 3일 SBS ‘8뉴스’ 시작과 함께 5분30초나 할애해 “우리가 작성한 기사에 대해 사과하고 삭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기사가 보도된 걸 맘에 안 들어 하는 쪽이든 기사가 삭제된 걸 맘에 안 들어 하는 쪽이든 우리에게는 부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 SBS에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항의 방문단이 잇따라 찾아왔다. 한쪽은 기사의 의도를 궁금해했고 다른 쪽은 기사 삭제에 외압이 있었는지 물었다”며 “그런가 하면 오늘 하루 기사가 특정 정당과 공동기획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주장이 나왔고 집권하면 외압을 받아서 기사를 삭제한 SBS 8시 뉴스는 없애 버리겠다는 발언도 나왔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외압도 없었고 공동기획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이 밝혔듯 뉴스로 나간 기사를 정정보도가 아니라 아예 삭제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급박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정치·자본 권력으로부터 어떠한 외압이 들어와도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 기사를 내리는 일은 언론으로서 저널리즘을 포기하는 행위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7월 메르스 사태 때 SBS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와 관련한 리포트 앵커멘트를 임의 수정, 재녹화해 올렸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박근혜 정부의 권력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을 때였고 사주에 불편한 기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든 ‘외압’을 행사했던 삼성과 관련한 기사였다.

당시 언론노조 SBS본부는 전례 없는 리포트 앵커멘트 재편집 논란에 사측에 원인과 책임을 묻기 위해 보도편성위원회를 요구했다. 기자협회 차원에서도 보도국장의 입장을 듣는 간담회를 여는 등 적극 대응해 보도 책임자들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지난해 박근혜 비선 실세들의 국정농단 사태 때도 SBS 구성원들은 언론으로서 이를 철저히 감시·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정치권력과 경영진의 보도 개입 중단 및 공정방송 촉구”를 주장하며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후 SBS는 보도 책임자 교체와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김성준 본부장이 ‘8뉴스’로 복귀한 후 SBS는 KBS·MBC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뉴스를 선보여 왔다.

박정훈 SBS 사장은 이번 세월호 인양 지연 보도 파문과 관련, 전 직원 담화문을 통해 “그동안 우리 조직원들이 피땀 흘려 오랜 기간 쌓아온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진 2일의 세월호 보도는 직접적으로는 세월호 유가족과 특정 대선후보뿐 아니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그동안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많은 노력을 해온 보도·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진들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행한 사건”이었다고 반성했다.

세월호 인양 고의 지연 의혹을 다뤘다가 삭제된 지난 2일 SBS ‘8뉴스’ 리포트
세월호 인양 고의 지연 의혹을 다뤘다가 삭제된 지난 2일 SBS ‘8뉴스’ 리포트
이런 조직을 향해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등이 ‘민주당의 언론 탄압에 SBS가 굴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지나친 정치 공세로밖에 볼 수 없다. 일각에선 ‘SBS 미디어그룹 윤세영 회장의 태영건설이 4대강 사업 비리에 연루됐기 때문에 문재인을 공격했다’는 추측도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SBS본부가 확인한 기사 취재·작성·편집 과정에서도 이 같은 의혹은 발견되지 않았다. 

SBS는 ‘함량 미달 보도’와 기사 삭제에 대해 거듭 사과 입장을 밝히고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불필요한 논란과 의혹을 확산시키기보다 SBS에서 ‘보도 참사’가 일어나게 된 원인 등을 냉철히 따져봐야 하는 게 우선이다. 정치권과 대선 후보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특히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의 경우 막말에 가까운 발언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홍 후보는 3일 공개 유세 현장에서 “내가 집권하면 SBS 뉴스 싹 없애버리겠다”며 협박성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은 4일 성명에서 “언론에 대한 생각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개인적인 판단을 객관화시켜 언론을 윽박지르고 협박하는 행위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는 “지난 3일 이후 대선 후보들은 SBS본부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기사와 새벽에 삭제된 사실만을 부각하며 모두가 자신들의 선전 프레임에 이용하고 있다”며 “잘못된 언론을 향해 누구나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비판이 아닌 정권을 위한 선전의 도구로 이용될 때 언론 자유는 다시금 어둠 속에 갇히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근거가 빈약한 부실한 취재와 석연치 않은 기사 편집 과정에서 만들어진 ‘무책임한 보도’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삭제됐다. 이미 공론화된 사안을 반론의 당사자가 항의했다는 이유로 ‘언론 탄압’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언론을 한낱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반헌법적 인식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이 진정 ‘실체적 진실’이 궁금하다면 정치적 수사가 아닌 제3자가 참여하는 공정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 될 일이다. 마침 전국언론노조 SBS본부가 조사의 객관성을 위해 SBS구성원들이 아닌 시청자위원을 중심으로 진상조사위를 만들기로 했다. 정치공세를 중단하고 이 결과를 지켜보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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