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은 삼성그룹 현안을 둘러싼 ‘윗선’의 부당한 지시에 일지를 작성하고 문건 사본을 만들어두는 등 물증을 남겼다. 문화체육관광부 직원들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자료를 보관한 것처럼 이들도 ‘보관하고 있던 물증’을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제출했다. 이들 자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2차 구속영장 청구’ 시 요긴하게 쓰였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제17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석아무개 공정위 경쟁정책국 기업집단과 사무관은 1년 넘게 보관해뒀던 ‘삼성전자·제일모직 합병관련 순환출지 금지 규정 법집행 가이드라인안 문건’ 스캔본을 지난 특검팀 수사 기간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석 사무관은 선임인 김정기 과장의 지시로 2015년 11월 중순 경부터 12월23일까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 논의 과정을 일지로 작성했다. 석 사무관은 이전 업무 기록을 되살펴 논의가 본격화된 10월14일부터의 논의 내용도 기재해넣었다. 해당 일지는 특검의 공정위 압수수색 당시 석 사무관의 컴퓨터에서 발견됐다.

일지를 작성한 계기는 김학현 부위원장의 ‘태도 돌변’이었다. 공정위는 2015년 10월14일 삼성물산 합병으로 인해 생긴 삼성 계열사 간 ‘신규 순환출자 고리’에 대해 삼성SDI의 물산 지분 500만주, 삼성전기의 물산 지분 500만 주 등 총 1000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공정위 부위원장 및 위원장의 결재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김학현 부위원장은 이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난 11월18일 이를 취소하고 다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김정기 과장은 이날 후임 석 사무관에게 관련 일지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왜 작성하라고 했냐’는 조상원 검사의 질문에 석 사무관은 “이유를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추측하건대 내부 의사결정이 번복된 게 있었고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면서 “워낙 언론과 국회의 관심이 큰 사안이었다. (이후) 사실 확인이 안 될 수 있으니 기록하라고 지시한 것 같다”고 답했다.

누가 ‘대기업 감시자’ 공정위 결정을 돌변하게 할 수 있나

김 부위원장은 태도가 돌변한 11월18일부터 공정위가 최종 결정을 내린 12월23일까지 한 달 여 간 ‘처분 주식을 줄여라’는 취지로 일관되게 지시했다. 이는 삼성 측에 유리한 방향이었다. 계열사의 삼성물산 지분 감소 규모가 줄어 지배권 약화 정도를 경감시킬 수 있었다.

김 부위원장은 ‘결정 번복’ 지시를 내리기 전날인 11월17일 삼성 미래전략실(현재 해체)의 김종중 사장을 성남 판교 소재 일식집에서 만났다. 특검은 김 사장이 김 부위원장에게 ‘공정위가 결정한 처분 주식 1000만주가 너무 많다. 삼성 SDI 500만 주만 재검토해달라’고 청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석 사무관을 포함해 김 과장, 곽세붕 경쟁정책국장은 11월20일과 27일 두 번에 걸쳐 ‘더이상 통보 연기가 불가능하다’ ‘기존 결정 내용을 공식 통보하고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요청했다. 김 부위원장은 ‘삼성에 통보하면 절대 안된다’며 삼성 측이 제공한 자료를 공정위 검토보고서에 반영하도록 지시했다.

석 사무관은 삼성 관계자도 11월 중순 전까지 ‘공정위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장영인 상무와 이근수 부장은 10월20일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실에서 석 사무관과 김 과장을 만나 공정위의 ‘1000만 주 처분’ 결정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미전실 이왕익 전무와 함께 2주 가량 뒤인 11월5일에도 석 사무관과 김 과장을 찾아와 ‘공정위 검토 의견에 따라 신규 순환출자 고리 문제 해소할 것이니 통보 시점을 2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삼성전자 대외협력팀은 11월9일에도 공정위 측에 ‘삼성 기업집단 순환출자 관련 요청’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 “(통보) 유예기간 내 관련 의무 이행할 계획”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일주일 여 후 삼성전자 및 김학현 부위원장의 태도가 반대로 선회했다. 정재찬 위원장은 결국 12월23일 삼성SDI가 삼성물산 지분 500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는 결정에 사인했다.

석 사무관과 김 과장은 이날까지 정 위원장에게 ‘900만 주를 처분 주식 대상으로 하는게 맞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공정위는 12월20일 김 부위원장의 문제제기를 수용해 기존 1000만 주 처분 결정을 ‘900만 주’ 처분안으로 바꾸었다. 석 사무관은 “위원장은 12월22일 ‘내일 오후에 다시 보자’고 하며 그날 결재를 하지 않았다”면서 “상당히 고심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안종범 역정낸다. 빨리 500만 주 처분 결정해라”… 삼성은 정유라 승마지원 중

석 사무관은 위원장이 결재하기 하루 전인 12월22일 오후 3시 경 ‘합병관련 순환출지 금지 규정 법집행 가이드라인’ 수정본을 스캔했다. 김 부위원장은 석 사무관이 작성한 가이드라인 초안에 처분주식 ‘500만 주’ 안을 2안으로 추가하라고 가필한 뒤 문건 결재를 반려했다. 과장, 국장까지 결재를 거친 문건이었다.

석 사무관은 김 부위원장의 말대로 ‘500만 주 처분’안을 추가한 뒤 다시 결재를 받았다. 이후 석 사무관은 수정 전 문서를 바로 스캔했고, 특검 수사가 시작될 때까지 보관했다.

특검 측 수사에 따르면 김 부위원장 돌변의 배후엔 삼성그룹 미전실과 청와대가 있다. 최상목 전 경제금융비서관은 11월17일 김 부위원장에게 전화해 ‘삼성 측이 불만이 있으니 잘 검토해달라’는 취지로 말했다.

특검은 최 전 비서관이 12월21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으로부터 ‘500만 주만 처분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최 전 비서관은 김 부위원장에게 이 지시를 전달했다. 김 부위원장은 석 사무관을 불러 ‘500만 주만 처분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요구했다.

최 전 비서관은 12월22일에도 안 전 수석으로부터 ‘위원장에게 빨리 500만 주 결정하게 해라’는 지시를 받고 김 부위원장에게 “안 전 수석이 아주 역정을 낸다. 상황이 좋지 않다. 형님이 위원장님께 2안(500만 주 처분)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고 압박했다.

특검은 이와 관련해 재판부에 공정거래위원장의 결재까지 끝난 결정을 번복한 배경에 방점을 찍어달라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특검은 삼성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승마 지원 뇌물의 대가로 부정청탁한 현안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그해 8월26일 최씨 소유 독일 주재 회사 ‘코어스포츠’와 ‘삼성 승마단 독일 전지 훈련 지원’ 명목으로 213억 원 규모의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9월14일 코어스포츠에 용역대금 10억8687만 원 지급했다.

삼성전자는 이어 10월2일 5억5천만원을 최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후원금으로 송금했다.

10월14일, 삼성전자는 승마선수단 차량 3개 구입 대금 명목으로 2억 4418만 원을 코어스포츠에 지급했다. 일주일 뒤인 10월21일 삼성전자는 명마 ‘살시도’ 구입대금 명목으로 코어스포츠에 7억 4915만 원을 송금했다.

삼성전자는 또한 11월13일 살시도 보험료 명목으로 8217만 원을 코어스포츠에 송금했다.

11월20일, 미르재단 출연금 납부를 위해 삼성전자는 60억 원, 삼성화재는 25억 원, 삼성물산은 15억 원을 각 분담해 지급했다. 삼성생명은 11월25일 미르재단에 25억 원을 출연했다. 삼성그룹은 총 125억 원을 미르재단 출연금으로 납부했다.

삼성전자는 12월에도 정씨 측에 승마지원 명목으로 총 11억 여 원을 코어스포츠에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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