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KBS 라디오 녹화 방송 당일 ‘정치적 이유’로 출연이 취소돼 KBS 블랙리스트 논란에 선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81)가 KBS 결정에 대해 “내 80년의 삶을 구겨 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한 교수는 지난 5일 이주향 수원대 교수가 진행하는 주말 KBS 1라디오 프로그램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 녹화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지난 5월 펴낸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하지만 녹화 방송 당일 제작진으로부터 출연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원 KBS 1라디오 국장이 “이 책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인문학이 아니다”,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으로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취지로 출연 불가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국장은 전직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된 직후인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20대 국회’, ‘헌법재판소’라고 쓰인 근조 리본으로 교체하는 등 탄핵에 반대하는 뜻을 표현해왔던 인사다. ‘5·18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페이스북에 게시하거나 극우적 성향 인사들을 패널로 섭외할 것을 지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통일·교육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KBS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취소 통보를 받아 KBS 내 ‘블랙리스트’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통일·교육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KBS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취소 통보를 받아 KBS 내 ‘블랙리스트’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한 교수는 10일 오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유신 때 방송 녹화를 다하고 방송이 못 나간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녹화 당일 못하게 하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며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언론 적폐’가 얼마나 깊게 구조화됐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통일·교육부총리를 지냈고 해방 이후 지식인으로 살아온 그의 출연 불가 소식은 KBS에서 다시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진 계기가 됐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10일 오후 2시 한 교수의 출연 취소를 포함해 KBS에서 정치적 이유로 출연·하차 통보를 받은 인사들의 증언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 KBS 녹화 방송이 예정돼 있었는데 취소됐다.

“한 달 전쯤 출연 제의를 받고 질의응답을 제작진과 주고받았던 것 같다. 5일 오후 KBS 스튜디오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작가가 사달이 났다고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오늘(5일) 녹화를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국장이라는 사람이 내 자서전이 정치적이라며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있을 때부터 그의 딸이 대통령을 할 때까지,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권력을 비판해왔다.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너무 허탈했다.”

- 출연 취소 사유가 ‘회고록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옹호했다’는 식이다.

“내 책이 특정 정치인을 위한 정치 평론이라고 폄하한 것이다. 굉장히 분노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근현대사를 거친 내 삶이 조금이나마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쓴 책이다. 에필로그에서 박근혜 국정농단 관련 내용을 담았는데, 당시 문 후보(문재인 대선 후보)와 나눈 대화 일부를 적었다. 촛불 시민 혁명의 열망을 배반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성숙한 시민 혁명의 뜻을 존중해서 정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담당 국장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그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제목만 읽고 경솔하게 판단했다는 취지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 원로 지식인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펴낸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 원로 지식인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펴낸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출연 취소와 관련해 이 국장은 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울대 교수와 철학과 학생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한 교수는 이 국장에 대해 “어떻게 책도 읽지 않고 아래 사람에게 저런 지시를 내리느냐. 회고록을 특정 정치인을 위한 것처럼 폄하하는 것은, 내 80년의 삶을 구겨버리는 일”이라면서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도 한 개인이 아닌 한 시스템으로서의 KBS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 KBS에서 출연자들이 정치적 이유로 출연하지 못하는 경우는 이번뿐이 아니다.

“유신 때부터 대학 교수를 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이런 식의 조치가 이뤄진다는 건 경악할 만한 일이다. 유신 때에는 방송을 녹화한 뒤 끝내 방송이 못나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 처럼 녹화 당일 못나오게 하는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다. KBS가 누구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이 공공을 위한 결정인가? 언론 적폐가 얼마나 깊게 구조화된 것인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KBS 그 자체가 적폐라는 생각이 든다.”

미디어오늘은 10일 오전부터 이제원 국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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