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통일·교육부총리를 지낸 원로 지식인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81)의 KBS 출연을 막아 블랙리스트 논란을 부른 KBS 라디오 국장이 지난달 이정렬 전 판사(법무법인 동안 사무장) 출연에 대해서는 “이 전 판사는 쓰레기”, “(이 전 판사의 출연은) 심각한 방송사고” 등의 막말을 제작진에 퍼부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제원 KBS 라디오프로덕션1담당(국장급)은 지난달 10일 방송된 KBS 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 이 전 판사가 출연한 것에 대해 담당 PD를 불러 강하게 질타했다. 이 전 판사 출연은 “심각한 방송사고”라는 것이다.

이날 이 전 판사는 라디오 프로그램 속 코너 ‘인문의 숲을 거닐다’에 나와 최근 헌법 개정 논의를 인문학 관점에서 진단하고 분석했다. 헌법 전문 의미와 상징, 개헌 논의 상황을 다룬 것이다. 

해당 방송은 KBS 사내 심의 기구인 심의실의 심의를 문제없이 통과했고 사후 심의평도 방송 내용이 충실했다고 평했으나 이 담당은 편향적이라고 문제를 삼았다.

▲ 이정렬 전 판사가 지난해 10월 한겨레TV의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한겨레TV
▲ 이정렬 전 판사가 지난해 10월 한겨레TV의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한겨레TV
언론노조 KBS본부에 따르면, 그는 제작진에 “이정렬 전 판사는 쓰레기다”, “(이 전 판사 출연은) 심각한 방송사고다”, “법은 인문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사내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 같은 내용은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오태훈 부위원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오태훈 부위원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 2일 방송된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는 KBS에서 손꼽히는 환경 전문 PD인 신동만 PD(밤의 제왕, 수리부엉이 등 제작)가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 ‘반갑다! 이 책’ 코너에서 자신이 집필한 동화 ‘쇠제비 갈매기의 꿈’을 놓고 대담을 나누던 신 PD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사례를 지적하면서 하루바삐 생태계가 건강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자 이제원 담당은 제작진을 불러 “4대강 사업 비판은 일부 의견”, “방송에서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공정성을 해쳐”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나아가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해 내부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담당은 KBS 1라디오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에서 MC가 “최근 촛불집회에는 자녀를 동반한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번 주에는 얼마나 모일지 궁금하다”고 발언하자 생방송 스튜디오로 내려와 MC에게 고성까지 지르며 질타했다.

이외에도 KBS 라디오 방송에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재산을 언급하면 이 담당이 우 전 수석 명예가 훼손될 수 있다며 MC에게 20~30차례 문자메시지를 보내 압박한 사례, 지난 라디오 대선 개표 방송에서 한 패널이 박근혜 탄핵이 국민 힘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하자 이 담당이 이에 항의하며 담당 PD를 압박한 사례들도 공개됐다. 

라디오 방송 출연진 명단을 작성해 사전에 보고하도록 한 것도 이 담당의 요구라고 언론노조 KBS본부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성재호 본부장은 “지속적으로 이 사람을 제작 책임자로 놔두고 있는 것은 고대영 사장의 ‘미필적 고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며 “블랙리스트 논란은 고대영 체제가 조장한 것이다. 고 사장이 왜 회사를 떠나야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이 담당은 박근혜 탄핵 직후인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20대 국회’, ‘헌법재판소’라고 쓰인 근조 리본으로 교체하는 등 탄핵에 반대하는 뜻을 표현해왔던 인사다. ‘5·18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페이스북에 게시하거나 극우적 성향 인사들을 패널로 섭외할 것을 지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앞서 5일 예정된 한완상 교수의 라디오 녹화 방송 출연에 대해서는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으로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취지로 출연 불가 입장을 밝혀 블랙리스트 논란을 자초했다. 

한 교수는 KBS 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에 자신의 회고록인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를 이야기 주제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KBS 출연이 취소되거나 보류되는, 이른바 ‘KBS 블랙리스트 논란’은 유독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끊이지 않았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문재인 대통령을 대선 후보 시절 지지했다가 출연 보류 통보를 받았고, 박근혜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했던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도 KBS 블랙리스트 논란에 휩싸였다. 

▲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황교익 씨 인터뷰 영상이 공개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KBS에는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있다’ 기자회견에서 황교익 씨 인터뷰 영상이 공개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한편, 미디어오늘은 이 담당의 입장을 물으려 했으나 그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언론노조 KBS본부도 이 담당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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