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부터 시작된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 출석해 8시간 가량 증인 신문에 임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미래전략실(현재 해체)은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였다’는 구체적인 경험 진술을 내놨다. 삼성 측이 “증거를 대라”며 재판 초기부터 부인해왔지만 김 위원장은 “국민 모두가 아는 팩트”라며 “이걸 부정하는 것이 과연 이재용 부회장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2013년부터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일부 미전실 임직원과 대화 창구를 유지해왔다. 계기는 2013년 김 위원장이 ‘경제민주화와 삼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한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였다. 김 위원장은 법정에서 “나나 경제개혁연대가 주로 수행하는 일이 기업 지배구조 관련 문제였기에 삼성 측에서는 이 문제를 담당하는, CFO(최고재무관리자)라 할 수 있는 김종중 사장과 주로 대화했다”고 밝혔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이후 김 사장은 삼성그룹 내 중요 현안 대부분을 김 위원장에게 미리 알려왔다. △삼성SDS 및 제일모직 상장 △‘메르스(MERS) 사태’ 대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취임 △삼성엔지니어링-삼성중공업 증자 방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이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김 위원장은 “법적 논란,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있는 의사 결정 사안이 있을 경우(였다)”며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이나 형식적으로 이사회에서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유선상 혹은 직접 만나서 알려준 적이 많았다”고 밝혔다.

미전실이 이건희 회장 일가의 그룹 지배력을 관리하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라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처럼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은 없다. 김 위원장은 “그래도 한국은 ‘미전실이 있다’ 정도는 안다”며 “수십억 달러 자금을 투자하며 주요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 외국언론조차 미전실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접촉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 등 피고인들도 재판 초기부터 특검의 컨트롤타워 주장을 적극 부인해왔다.

김 위원장은 이런 미전실을 ‘커튼 뒤의 조직’이라고 불렀다. 그룹 내에서 막강한 결정권을 행사하지만 실체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에 따르면 계열사에서 열리는 주주총회, 이사회 등은 형식적인 기구에 가깝고 주요 현안과 관련된 “모든 것은 사전에 미전실에 의해 취합되고 결정”됐다.

삼성물산 합병을 둘러싼 정황은 단적인 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이 논란이 됐던 시기, 삼성물산 홍콩 투자자의 불만을 청취한 김 위원장은 김 전 사장에게 ‘많은 투자자들이 지금 취소하고 6개월 후 다시 추진하면 100% 찬성한다고 했다’고 조언했다. 김 위원장은 “미전실 임원이 홍콩 투자자들을 먼저 만나고 삼성물산 이사들이 그 다음에 홍콩을 갔다”면서 “(합병 관련 정보가) 김신 삼성물산 사장에게 과연 전달이나 됐을까”라고 반문했다.

김 위원장은 “확실한 증거는 각 계열사 이사회 결의가 있기 전이나 그 날 아침, 혹은 하루나 이틀 전, 미전실에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려되는 문제점은 뭐냐’ 등을 물어봤다”면서 “그때 나에게 물어보는 김종중 사장의 태도는 이건 이미 결정된 거라는 태도였다”고 강조했다.

김 전 사장은 김 위원장을 상당히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사장은 ‘뭘 믿고 나에게 이런 걸 알려주느냐’는 김 위원장의 물음에 ‘김 교수는 이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거나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이지 않느냐’고 답했다.

때문에 김 전 사장은 김 위원장에게 허심탄회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어렵게 삼성물산 합병이 성사된 후 김 위원장이 “이번에 너무 무리하셨다”고 농담을 하자 김 전 사장은 애썼다는 취지로 ‘무리한 게 아니라 무식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김 전 사장은 김 위원장에게 ‘올해 내로는 일을 치룰 것 같다’며 ‘경영권 승계 작업’ 추진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재용·최지성·장충기·김종중 4인 테이블 체제’… “아버지의 가신들, 이재용에 왜곡된 정보 줘”

김 위원장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의 부재 후 미전실은 ‘4인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됐다. 김 전 사장은 김 위원장에게 ‘이건희 회장이 건재할 땐 이학수 부회장 중심의 참모조직이 중요 의사 결정을 하고 안을 마련해 보고하면 이건희 회장의 최종 승인을 받아서 계열사가 집행하는 구조였다’면서 ‘현재는 이재용 부회장, 최지성 전 미전실 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사장), 김종중 전 사장 등 임원 4인이 외국 출장이 없는 한 매일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한다’고 밝혔다.

이견이 있을 땐 “10개 중 4개 정도, 40% 정도는 이재용 부회장에 뜻에 따라 결정되고 나머지는 참모 건의대로 결정”됐다. 김 위원장은 “김종중 사장이 ‘이재용 부회장 체제가 다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서 “이재용 부회장 스스로도 자신감이 부족했기에 사실상 집단 지도 체제로 의사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현실과 괴리된 미전실 간부의 판단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낳은 것이라 비판했다. 그는 “김종중 사장을 통해 삼성 내부 사정을 이해하게 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삼성은 성공의 역설에 빠져있는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면서 “삼성의 독특한 시스템과 의사결정 구조가 성공을 가져왔다고 판단하는거 같다. 과거엔 맞았지만 지금은 너무 변했다”고 말했다.

그는 “3세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가신들이 많은 정보를 왜곡하고 이재용 부회장에게 올바른 판단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생각한다”면서 “어떤 그룹도 삼성과 같이 하지 않는다. 현대차도 하지 않는다. 삼성은 정말 독특한 그룹”이라고 지적했다. 삼성 측의 대대적인 로비 활동을 지적한 말로, 다른 대기업 그룹은 “일이 터지고 수습”하는 반면 삼성은 “사전에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최근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자사주를 전량 소각한 것을 두고 “고통스런 상황을 벗어나 자유로운 신분이 돼 경영을 할 수 있을 때, 앞서 말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건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 그리고 한국경제 모두에 매우 긍정적인 결과”라며 “오늘의 불행이 축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리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앞서 “자사주를 소각해 정치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시장과 사회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방식으로 (경영권 승계를)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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