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방송 밥을 먹고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BBC를 성지처럼 찾는다. 방송사 사장 이하 간부들은 물론이고 일반 기자, PD, 교수, 방송 관련 기관의 공무원들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해마다 BBC를 방문하거나 연수하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듣고, 그 현장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과시용일 뿐이다. 한 치의 발전도 없이 뒷걸음질 치는 한국의 방송 판을 보면 그런 심증은 확신이 된다.

사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BBC에 대한 정보는 물론 영국 방송 산업 전반에 걸쳐 궁금한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방문을 허락해 달라, 누구를 만나게 해 달라며 BBC를 조른다. 단언컨대 BBC를 찾는 사람들의 태반은 BBC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저 BBC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건지면 그것으로 ‘방문목적 달성’이라며 흡족해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불편해할 만한 이야기,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어 할 만 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 영국 BBC 로고.
▲ 영국 BBC 로고.
BBC를 필두로 영국의 방송 산업이 세계를 주름잡게 된 비결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꿈꾸는 방송인이 그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꼽을 것이다. 꿈은 BBC 같은 방송국 안에만 실현 가능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영국의 PD들은 이리저리 잘 옮겨 다닌다. BBC에 있다가 다른 방송사나 프로덕션으로 옮기기도 하고 프리랜서가 되기도 한다. 방송인이 꿈을 펼치는 데 소속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거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하는 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또 1년에 한 번쯤은 가족을 데리고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

공정한 시스템이란 이런 거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가며 설명해 보겠다. 우선 BBC는 전체 제작 프로그램의 50%를 독립 PD (혹은 독립제작사, 통칭 외주라고 한다)들에게 개방해 놓고 있다. BBC 소속이 아니어도 재능이 있다면 누구든 BBC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BBC의 제작비는 수신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BBC가 독식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잘 짜인 투명한 시스템을 통해 인하우스와 외주제작사 모두에게 차별, 차등 없이 사용되는 이유다.

프로그램 제작 계약서는 제작이 결정된 순간 작성한다. 계약서에 서명이 끝나면 독립 PD는 단계적으로 제작비를 받고 방송되기 전 모든 결제가 완료된다. 한국은 이미 제작이 들어간 상태에서 작성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제작이 완료된 상태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도 있다. 계약을 포기하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일방적인 계약서. 공정을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다. 제작비도 후급이다. 독립 PD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제작해야 한다. 제작비는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야 받을 수 있다.

▲ BBC 표준제작비.
▲ BBC 표준제작비.
차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BBC는 제작비에 관한 한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연출자가 얼마의 이익을 남기든 그건 그네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품질에 있을 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작비 지출계획, 나아가 영수증 제출을 요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경영권 침해를 버젓이 행하는 셈이다.

BBC는 매년 물가를 반영해 작성한 표준 제작비를 발표한다. 장르별, 채널별, 시간대별, 내용별로 지급 액수에 차등을 둔다. 한 시간짜리 방송을 기준으로 다큐멘터리의 경우 최저 약 7500만원(5만 파운드)에서 최고 7억5000만원(50만 파운드)까지 책정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기준이나 원칙이 아예 없다. 오히려 물가대비 제작비가 매년 깎이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십수년 째 이어지고 있다. 故박환성 PD가 제작 중이던 <야수의 방주>의 경우만 해도 자연다큐라는 특수성에 더해 EBS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프라임 타임에 편성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편당 7000만원 수준이었다. BBC 제작비 기준에서 보면 최저 수준도 안 되는 것이다.

영국은 협찬에 대해 매우 까다롭다. 광고를 하지 않는 공영방송 BBC는 원칙적으로는 협찬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않는다. 그나마 상업방송은 가능한데 대부분의 협찬은 방송사가 직접 받는다. 방송사로부터 제작비를 받는 독립PD가 협찬까지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탓 이리라. 더러 독립PD가 협찬을 받아오면 방송사는 독점사용권 연장이나 계약서에 합의된 이외의 채널이나 매체에 방송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할 수 있다. 합리적인 선에서 방송사가 제공하는 제작비를 줄이거나 협찬금의 일부를 나눌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관행이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제작비를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사가 협찬금의 대부분을 강탈해가는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다는데 있다.

BBC는 제작비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편집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계약서상에 명시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변경을 요구하려면 독립 PD에게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방송사 소속 담당 PD가 일방적으로 편집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추가비용은 독립 PD가 부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인격모독과 물리적 폭력이 가해지는 건 덤이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영국의 경우 제작된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은 프로그램을 연출한 연출자 즉 독립 PD에게 주어지며 방송사는 제작비를 제공한 대가로 통상 5년 정도의 독점사용권을 부여받는다. 5년 이후에도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싶으면 독립 PD에게 추가비용을 지급하고 연장할 수 있다. 단, 독점사용 기간이라도 BBC는 계약서에 명시된 채널과 시간대, 재방송 횟수를 지켜야 한다. 계약서에 명시된 범위를 벗어나 사용할 필요가 있으면 BBC는 독립 PD의 동의를 얻고 추가비용도 지급해야 한다.

독립 PD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제작한 프로그램을 일반에 판매할 수 있다. DVD 판매도 가능하고 몇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다른 채널에 판매할 수도 있다. 해외 판매도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BBC는 최고 20%까지 수익 배분을 요청할 수 있다. 한국은 방송사가 저작권 일체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무제한 이용하며 어떤 수익도 독립 PD와 나누지 않는다. 독립 PD가 해외 판매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원천봉쇄’다. 프로그램이 창고에서 썩을지언정.

독립 PD 또는 독립제작사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권리, 즉 저작권을 돌려주면 독립 PD는 외부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에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게 된다. 고품질 프로그램의 제작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에 대한 주인의식과 제작 및 판매 의욕이 충만해진 PD들이 적극적으로 시장개척에 나서면 세계시장 선도도 가능해진다. 방송사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제작비 전액을 책임질 필요가 없어지면서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 수도 있고 독립 PD들이 개척한 시장에서 올린 수익을 배분받으면서 추가적인 이익도 챙길 수도 있다. ‘상생’이 가능한 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미 영국에서 증명된 바다.

방송사 소속의 PD들이 두려움 없이 독립제작사로 옮기거나 독립 PD의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반대의 선택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연성은 중요하다. 방송시장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방송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때문이다. 영국 PD들이 그런 선택의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이상에서 살펴본바 ‘공정거래’에 있다.

그런데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채널4(CH4)다. 영국 정부는 1982년 공영방송 채널4를 출범시켰다. 채널4에서 주목할 점은 채널4는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생산하지 않고 100% 외주제작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능 있는 독립 PD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줌으로써 방송시장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동시에 다양한 긍정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고 싶다. BBC가 부러운가? 한국 방송의 세계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자. 안팎으로 구별된 차별의 벽을 허물고 PD들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 능력만큼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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