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던 파면된 전 대통령 박근혜씨가 추가 구속영장 발부 직후 열린 재판에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나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며 최초로 입을 열었다. 박씨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밝혔고 변호인단 7명은 전원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파면된 대통령 박근혜씨는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전 대통령 뇌물수수 등 혐의 사건 80차 공판에서 추가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며 이같이 말했다.

▲ 박근혜씨가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0월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 박근혜씨가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0월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재판부는 이날 공판을 시작하며 “10월13일 SK그룹 관련 뇌물 수수 혐의 공소 사실과 관련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우리 법률은 최초 공소장에 없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 구속영장 발부가 가능하다고 결정한다”며 “유죄의 예단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유·무죄 여부는 검찰의 입증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는지 등 엄격한 기준을 정해 최종 판단할 것”이라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변호인 의견을 물었고 유영하 변호사는 “피고인이 말씀 드릴 것이 있어 기회를 주시면 앉아서 하겠다”고 답했다.

“구속되어 주 4회 씩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들이었다”며 말문을 연 박씨는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되돌아왔고 이로 인해 저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다”며 발언을 시작했다.

박씨는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던 공직자들과 국가경제를 위해 노력하시던 기업인들이 피고인으로 전락한 채 재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면서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과 법이 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심신의 고통을 인내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저는 롯데·SK 그룹 뿐만 아니라 재임기간에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추가 구속영장 발부로 구속기간이 내년 4월 중순까지 연장된 것과 관련, 박씨는 “검찰이 6개월 동안 수사하고 법원은 다시 6개월 동안 재판했는데 다시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변호인들은 물론 저 역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변호인단은 사임의 의사를 전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발언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라며 “끝으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박씨는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다”며 “모든 책임은 저에게 묻고, 저로 인해 법정에 선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에게는 관용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박씨의 발언 직후 법정 질서 정비를 위해 오전 10시 10분 경 휴정을 선언했다.

재판부 “사임 철회 해달라”… ‘친박’ 시민들 “나를 사형시키라” 법정 소란

재판부는 재판 종료 전인 10시50분 경 변호인단을 향해 “현재 피고인에 대해 가장 유리한 변론을 할 수 있는 변호인단”이라며 “국민에 대해서도 조속한 진실 규명해야 하는 사건이므로 조속한 사임 철회를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 직후 공판 종료를 선언했다.

유영하 변호사는 앞서 10시30분 경 재개된 공판에서 “(변호인은) 피고인이 어떠한 증거도 인멸할 우려가 없다는 이유를 제시하며 추가 구속영장 발부가 부당할 뿐 아니라 위법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면서 “혹여 피고인이 석방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 아직 신문이 이루어지지 않은 증인을 회유해 기존 검찰 진술을 번복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피고인이 이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건지 변호인으로서 참으로 납득이 안된다”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우리 변호인들은 길지 않은 법조인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 나라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인신구속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두는 이유는 재판 진행의 편의성보다 피고인의 인권보호와 방어권 보장이 더 상위의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배웠다”며 “피고인은 그 동안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극한의 인내로 참아왔으며 심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 4회 공판기일을 견뎌왔다”고 주장했다.

유 변호사는 이어 “저희 변호인들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더이상 본 재판부가 진행할 향후 재판절차에 관여해야 할 어떠한 당위성도 느끼지 못했다”며 “피고인을 위한 어떠한 변론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오늘 모두 사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재판부에 “법치주의가 형해화되고 광장의 광기와 패권적인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형식적인 법치주의가 부활하면, 우리나라 인권의 역사는 후퇴할 것이고 야만의 시대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재판부는 진정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이제 저희 변호인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피울음을 토하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더럽고 살기가 가득한 이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난다”고 말했다.

유 변호사가 이 문장을 말하는 동안 방청석에 앉은 일부 친박 성향의 시민들 사이에서 울음 소리가 나왔다. 유 변호사는 이어 “오늘 저희들의 이런 결정에 대해 무책임하고 꼼수를 부린다는 비난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모든 비난은 저희들이 감당하겠다”고 말했다.

유 변호사는 이후 의견을 마칠 때까지 추가 구속영장 발부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 2017년 10월13일 본 재판부의 피고인에 대한 추가구속영장 발부 결정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면서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법 역사상 치욕적인 흑역사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이에 “재판부에서 피고인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적법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변호사가 하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적법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전부 사임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한 것은 유감이다. 다만 향후 적절한 재판 진행을 위해 피고인 측에서 다시 재판에 협조해주시기 요청드린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에 “현재 변호인단이 누구보다 사건의 내용과 진행 상황을 잘 알기에 그런 분들이 사퇴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피고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일반 국민에 대한 이 사건의 실체 규명도 상당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부분을 고려해 사임 여부를 신중하게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새로운 변호인들이 10만 쪽이 넘는 수사기록과 그 동안 재판기록을 검토해야 할 경우 심리가 상당 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고, 미결구금일수가 증가해 피고인에게 그 피해가 돌아간다”며 “이 사건은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이 침해되지 않는 한도에서 신속히 진행해 실체적 진실을 국민 앞에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또한 “재판부는 어떠한 예단 없이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형사소송법 제282조에 따르면 피고인이 사형, 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재판부는 변호인 없이 재판을 개정하지 못한다. 법원은 피고인에게 변호인이 없을 때 직권으로 국선 변호인 등을 선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박씨는 현재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 결정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국선변호인이 지정돼 재판에 임하게 된다.

재판부가 공판 종료를 선언한 직후 법정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한 중년 여성은 “판사님 저를 사형시켜주세요.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법정 바닥에 드러누웠다. 재판부는 즉시 퇴정을 명령했다.

피고인이 퇴정할 동안, 일부 친박 성향의 시민 무리가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끝까지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소리쳤다. 한 중년 여성은 “나를 죽여라” “대한민국 국민들 다 죽여라” 소리치며 울면서 법정에 뛰어들었다. 이 시민은 감치재판 회부 명령을 받았다.

재판부는 변호인 선임 여부를 지켜본 뒤 오는 19일 오전 10시 81회 공판을 열기로 결정했다. 81회 공판엔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증인 신문이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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