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한 미디어 환경을 위해서는 유리천장뿐 아니라 수평적 칸막이도 없애야 한다.”
21일 서울 용산구 상상캔버스에서 열린 ‘우리가 함께 만드는 성평등한 대중매체’ 토크콘서트에서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한 말이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유리천장’이란 표현은 익숙하다. 그런데 ‘수평적 칸막이’란 무엇일까.
“여성가족부는 2022년까지 여성 고위공무원단 비율 10%, 공공기관의 여성임원 비율 20%를 달성하기로 계획했다. 이 기관에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포함된다. 여성 임원 비율을 높이는 유리천장 깨기도 중요하지만, ‘수평적 칸막이’ 역시 사라져야 한다. 수평적 칸막이는 같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성별 역할이 다른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방송뉴스에서 남자 앵커는 그날의 중요한 리포트를 중심으로 멘트를 한다면, 여성 앵커들은 그보다 덜 중요한 리포트에 배정되는 관행이 대표적이다.”(정현백 장관)
김정은 MBC ‘뉴스투데이’ 작가는 “실제로 방송뉴스 메인 앵커 중 남성 대부분은 기자 출신이다. 여자 앵커는 대부분 아나운서 출신”이라며 “기자 출신 앵커가 마지막 대본을 수정하니, 결국은 남성 기자들 중심으로 뉴스가 만들어 진다”고 설명했다. 김 작가는 “특보의 경우 거의 남성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방송사의 정치적 성향과 다른 뉴스를 전할 때는 여성 아나운서를 시킬 때가 많다”며 “이런 환경이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성평등한 미디어 환경을 위해 적극적으로 악역을 맡겠다”며 “방통위와 방통심의위 여성 비율을 최소한 30%로 올리도록 압박하고, 제도적 방안 외에도 방송 종사자들이 성평등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방송 환경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정현백 장관은 여성 비율을 높이는 방법 외에도 남성 위주의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위해 △방송계 종사자 대상 미디어 성평등 교육 강화 △직장 내 성희롱 신고 창고 개설 △성평등 시나리오 공모전 확대 등의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기업에서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이 있는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건너뛰는 사람들이 있다”며 “장관 등 고위공무원들부터 의무적으로 성희롱 방지교육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압박하겠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희롱 신고 창고 개설을 방안을 밝히며 정 장관은 최근 가구 회사 ‘한샘’에서의 성희롱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한샘에서 신입사원이 입사한 지 사흘 만에 끔찍한 일을 당했다. 2차 피해도 이어져서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지금까지는 보통 신입사원이나 비정규직 사원들이 성추행을 당하면, 피해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식이었다. 이제는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해 기업별 신고 창고를 만들고, 직원들이 언제나 신고 가능하게 할 것”이라며 “이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기업에는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여성가족부가 준비한 설문 ‘대중매체에 바란다, 성평등 톡톡’에서 가장 많은 시민의 요구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성평등’이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남자아이에게는 자동차나 로봇을 가지고 놀게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소꿉놀이를 하게하는 등 성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있다는 지적이다.
최지은 전 아이즈 기자는 “‘마녀의 법정’의 경우, 야심차고 이기적인 성격의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까지 남성 주인공에게만 허용돼왔다”며 “물론 100점짜리 콘텐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제시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정현백 장관은 “성평등이란 남성의 파이(pie)를 뺏어서 여성에게 준다는 개념이 아니다. 전체적인 파이를 늘리고 남성과 여성 평등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처럼,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방송 종사자들이 불평등한 현실에 소리 질러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