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혁 JTBC 기자는 최순실 딸 정유라를 잡았다.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나며 박근혜·최순실에 대한 공분이 정점으로 치닫던 2017년 1월2일 오전 9시 JTBC는 한 줄 속보를 띄웠다. “[단독] 정유라, 덴마크 현지 경찰에 체포.” 특종에 물 먹은 기자들은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이 기자가 지난해 12월 펴낸 책 ‘그날 그곳 사람들’에는 정유라 추격기가 기록되어 있다. 독일 현지 취재에서 시작해 최순실 발자국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향하다 정유라 은신처 관련 결정적 제보를 받고 방향을 틀어 덴마크 북부 도시 올보르를 찾은 그. 그곳에서 ‘뻗치기’(취재원을 무작정 기다리는 취재 기법) 끝에 정유라 특종을 일궜다.

▲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리포트를 보도하고 있는 이가혁 JTBC 기자. 사진제공=자음과모음
▲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리포트를 보도하고 있는 이가혁 JTBC 기자. 사진제공=자음과모음
지난 8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인근에서 만난 이 기자는 정유라를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눈앞에 정유라가 지나갈 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너무 피곤했기도 했고 그동안 찍은 수십 시간 영상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이 시작됐다.” 그는 느린 덴마크 호텔방 인터넷으로는 많은 용량의 영상을 한국에 보낼 수 없어서 근처 PC방을 찾았다. 문 닫기 직전의 PC방에는 정상 요금의 열 배를 지불해야 했다.

이후 덴마크 사법당국과의 공조 아래 정유라 한국 송환이 이뤄졌다. 송환된 정유라는 ‘핵폭탄’에 가까웠다. 정유라는 지난해 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예고 없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삼성이 자신에게만 말을 지원했다, ‘승마 특혜’ 논란 후 삼성 승인 하에 삼성이 제공해준 말을 다른 말로 바꿔치기했다 등의 폭탄 증언을 계속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정유라 승마 훈련 지원을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바란 것”이라고 판단해 뇌물로 간주했다. 언론들은 이 부회장 유죄에 정유라 발언이 결정타였다고 평가했다.

▲ JTBC 정유라 특종은 협업의 결과였다. 독일·덴마크 등을 동행한 이가혁 JTBC 기자(왼쪽)와 이학진 카메라 기자가 덴마크 올보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자음과모음
▲ JTBC 정유라 특종은 협업의 결과였다. 독일·덴마크 등을 동행한 이가혁 JTBC 기자(왼쪽)와 이학진 카메라 기자가 덴마크 올보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자음과모음
논란도 있었다. 이 기자는 덴마크 은신처에 몸을 숨긴 정유라를 경찰에 신고했다. 숨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대치가 무려 36시간 계속되자 한계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꼬박 이틀을 차 안에서만 보냈다. 그렇다고 잠시 이곳을 벗어나 근처에 숙소를 잡고 체력을 충전한 후 다시 돌아오거나, 아예 취재를 중단하고 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취재진이 찾아온 사실을 정유라와 일행이 알게 된 이상, 우리가 자리를 뜨면 그들은 이 은신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길 가능성이 컸다.”(‘그날 그곳 사람들’, P92)

이 기자가 경찰 신고를 통해 정유라 특종을 잡았다는 점 때문에 국내 일각에서는 저널리즘 윤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는 “그가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했어야 했다”며 “그리고 만약 보도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끝까지 관찰자로 남았어야 했다. 그게 보도윤리다. 그런 게 2017년 언론계에 남아있다면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기자는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당시 국내에 있었던 여러 저널리즘 논의를 꼼꼼하게 읽었다”면서도 “현지에 있을 때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글과 기사, 여러 SNS 등을 통해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도 정리가 잘 안 됐지만 100% 지지를 받는 취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말을 아꼈지만 “현장의 타사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나 같았어도 그랬을 거야’라는 말을 해줬을 땐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며 적지 않은 고민을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번 책에는 정유라 취재 이외에도 평생교육 단과대학(일명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 투쟁에 나섰던 이화여대 학생들,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탄핵 심판 취재 등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 기자는 “국민들은 탄핵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공유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나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그 경험들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며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또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 이가혁 JTBC 기자가 지난 12월 펴낸 책 ‘그날 그곳 사람들’(자음과모음).
▲ 이가혁 JTBC 기자가 지난 12월 펴낸 책 ‘그날 그곳 사람들’(자음과모음).
이 기자는 “책을 쓰면서 다시 느꼈지만 기자 업무는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며 “정유라 취재의 경우 독일 교민 등 현지 상황을 잘 아는 분들의 말이 퍼즐처럼 맞춰진 것이다. 변화를 바라며 잘못된 것이 바로 서길 원하는 분들이 시간과 수고를 내주셨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기자는 현재 중앙일보·JTBC 통합 노조 전임자로 활동 중이다. 오는 여름부터 다시 기자로 현장에 서게 된다. 그가 돌아올 때면 KBS·MBC 정상화가 상당 부분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보도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SBS도 본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JTBC 독주 체제였던 ‘보도 시장’이 치열한 경쟁 체제로 새 국면을 맞는 것이다.

이 기자는 “‘우리도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항상 있어왔다”며 “타사가 정상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차원을 넘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겸손함을 잃지 않은 채 해왔던 대로 우리 할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JTBC 선·후배 동료들 간 분위기는 좋고 끈끈하다.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격변기에 운 좋게 사회부 기자였고 현장에서 쉴 새 없이 뛸 수 있는 연차였어요. 거창하게 저널리즘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JTBC는 아직도 현장에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두루뭉술하게 느낀 거지만 그게 손석희 선배가 말하는 ‘어젠다 키핑’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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