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어제는 누가 무슨 일을 당했어요.’ ‘오늘은 어떤 선배님이 당했어요.’ 김포공항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나를 붙잡고 앉아 그렇게 엉엉 울었다.”(하종강)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은 2000년 민주노조를 세우려 한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눈물'로 기억했다. 출장 때문에 김포공항을 자주 갔던 그는 평소 노동상담 해주던 승무원을 공항에서 곧잘 만났다. 하 전 소장은 2002년부터 이들이 쏟은 눈물이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한 빠게쓰’는 된다”고 했다.

대한항공 승무원 노조(대한항공노동조합 객실지부) 역사엔 ‘봄날’이라 불리는 때가 있다. 26%의 파격적 임금인상을 따냈고 비행시간 단축, 휴가 확충 등 노동조건을 대폭 개선했던 2000~2002년을 말한다. 봄날을 만들려고 애쓴 수십명은 서로를 ‘민주객실지부’라고 불렀다. 회사를 견제하지 않는 기존노조와 다르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봄날은 2년을 넘지 않았다. 곧바로 해고, 파면, 고소·고발전이 이어졌다. 최소 7명이 해고돼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을 검찰청과 법원을 오갔다. 해고보다 힘든 건 동료의 배신이었다. 과거 동지가 자신을 ‘횡령범’으로 고소했다. 일부는 회사의 사찰을 적극 도왔다. 결국 한 동료는 15층에서 몸을 던졌다.

▲ 2001년 3월2일 열린 영종도 신공항(현재 인천국제공항) 이전 관련 객실 지부 설명회.
▲ 2001년 3월2일 열린 영종도 신공항(현재 인천국제공항) 이전 관련 객실 지부 설명회.

‘노조 파괴’ 시작은 무단 해고부터

“대한항공노동조합 역사상 전무후무한 노조였다.”(전직 승무원 A씨) 2000년 ‘개혁파 승무원’들은 별도노조 설립을 미루고 기존노조의 객실지부로 대거 가입했다. 이들이 승무원 대의원 30석을 모두 차지하자 임금협상 기류가 바뀌었다. 노조는 2000년에 26%, 2001년엔 10.2%, 2002년엔 7.1% 인상을 따냈다. 이들은 생리휴가를 포함해 휴가·휴일을 대폭 확보했고 IMF 외환위기 후 ‘살인적’으로 강화된 비행일정도 고쳤다.

반전은 2002년 5월 한 노조 간부의 해고로 시작됐다. 객실지부가 ‘버팀목’으로 여겼던 박성진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 ‘무단결근’으로 해고됐다. 그는 민주객실지부의 전신인 ‘객실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추위)를 주도한 인물이자 1997년 연차 수당 미지급 문제로 회사에 승소했다. 그 덕분에 회사는 직원 1만여 명에게 50여억 원의 수당을 지급해야 했다.

해고 사유는 ‘1년 가량 노조 사무실 무단결근’이었다. 회사가 박 전 부위원장이 노조 중앙 사무실이 아닌 본사 안에 있는 ‘객실지부’ 사무실로 출근한 걸 결근이라고 꼬투리잡았다. 노조 집행부와 객실지부는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당시 박 전 부위원장은 ‘노조 민주화’를 위해 기존 노조위원장 불신임안과 직선제안을 꺼냈다. 박 전 부위원장이 사무실에 있으면 위원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사무실 분위기도 험악해지기 일쑤여서 같은 사무실을 쓰기 곤란했다.  박 전 부위원장을 전담한 노무팀 직원은 그에게 “객실지부로 출근하라”고 종용까지 했다.

“회사 대응이 그때부터 눈에 띄게 세련돼졌다. 노조 파괴 교육을 받은 게 아닌 가 싶을 정도로.” 전직 승무원 B씨는 노무팀 임직원이 시간당 백만 원을 호가하는 ‘사측 변호사’ 출장 교육도 받았다고 전했다. 회사 대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자르고 본다. 고소하고 본다. 직원들을 갈라친다.”(B씨)

“노조비 횡령했다” 투서 사건으로 파렴치범 매도

화룡정점은 2003년 5월 ‘투서 사건’이다. 회사는 ‘투서가 들어왔다’며 노조에 열성이었던 노조민주화추진위 간부 11명을 조사하려 했다. 한 10년차 사무장 직원이 인사·노무팀 임원에게 “내가 노추위에 낸 돈 100만원을 돌려받고 싶다. 철저한 진상조사를 해달라”는 투서를 넣었다. 투서에 적힌 직원 대부분이 즉시 대기발령됐다. 이들은 ‘공금을 횡령한 파렴치범’으로 몰렸고 소문은 오래 회사에 남았다.

▲ 한 10년차 사무장이 2003년 3월 19일에 회사 인사·노무 담당 임원에게 보낸 투서.
▲ 한 10년차 사무장이 2003년 5월 19일에 회사 인사·노무 담당 임원에게 보낸 투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모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10년 차’ 사무장은 없었다. 노추위에 100만 원을 낸 직원들은 모두 모금에 동의하고 스스로 돈을 냈다. 같이 노조를 준비하던 조종사들이 기장 125만원, 부기장 100만원씩 걷는 것을 보고 이를 따랐다. 노조 탄압을 예상해 노조 활동비, 해고 직원의 생계비·소송비용 등에 쓰려고 모았다.

이들이 횡령으로 고소돼 검찰조사를 받을 때, 수사검사는 ‘인출 기록이 하나도 없다’며 놀랐다. 모금액 2억5천만 원 가량이 2년 동안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2002년 해고자가 발생해 돈이 생계비, 소송비에 쓰일 때도 노추위는 동의를 받았다. 동의하지 않은 32명에겐 후원금을 전액 반환했다. 반환하지 않은 직원 중 160여 명은 서면으로 동의했고 나머지는 구두로 동의했다.

한편에선 추가 해고가 이어졌다. 기내흡연, 성희롱 등으로 승무원 2명이 해고됐고 1명은 정직 당했다. 모두 민주객실지부에 적극 참여한 승무원이었다.

해고자 7명, 8년 간 소송만 48번

‘횡령범’으로 몰린 주요 인사 4명은 2010년까지 7년 간 일을 못했다. 2003년부터 대기발령 신세였던 이들은 2005년 10월 모두 해고됐다. 이후 5년을 꼬박 법정다툼에 매진한 결과 2010년 1월 승소 확정을 받고 복직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방아무개씨(64)는 정년퇴직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7년 간 비행 한 번 못 해보고 복직 3개월 만에 퇴사했다.

2002~2010년까지 승무원 9명이 15개 사건에 연루돼 48번의 소송전을 치뤘다. “회사는 나중에 져도 돈만 내면 된다. 그 사이 사람 한 명 인생은 망가질 수 있다. 회사가 무턱대고 해고하고 고소하는 이유다. 이들은 대한항공 직원들의 본보기였다.” 2000년에도 대한항공을 다녔던 한 승무원 C씨의 말이다.

▲ 노추위가 2002년 후원기금을 해고자 생계·소송 지원에 써도 되는지 서명을 받은 동의서(왼쪽). 오른쪽은 2003년 투서 사건 이후 대한항공이 객실지부 전 남자 승무원으로부터 받은 사실확인서.
▲ 노추위가 2002년 후원기금을 해고자 생계·소송 지원에 써도 되는지 서명을 받은 동의서(왼쪽). 오른쪽은 2003년 투서 사건 이후 대한항공이 객실지부 전 남자 승무원으로부터 받은 사실확인서.

C씨는 “법정 싸움이 주는 정신적 피폐함만큼 ‘동료 간 반목’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해고자를 상대로 횡령 고소장을 검찰에 제출한 이들은 동료들이었다. 믿었던 동료들이 ‘후원금 납부에 동의한 적 없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승무원 50명이 ‘100만 원을 돌려달라’는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해고자들은 회사의 이간질 작업으로 받아들였다. 이 명단에 서명한 D씨는 “명단을 받으러 온 직원이 ‘100만 원 돌려받고 싶지 않느냐. 그럼 여기에 싸인해라’고 하길래 싸인했다”고 밝혔다. 1·2·3심 모두 무죄 선고났다.

이 사건은 한 승무원의 죽음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노추위 활동부터 해고자 소송 지원까지 함께 했던 김아무개씨가 2006년 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 15층 아파트 자택에서 뛰어내렸다. 후배들이 ‘어린 왕자’라 부를 만큼 인품이 따뜻했고 강직했던 김씨는 “직원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을 힘들어했다.

B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믿었던 선·후배들이 동료를 공금횡령범으로 몰거나 사측에 사찰 정보를 흘리는 것들을 보며 배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고 말했다. 독신이었던 김씨의 집은 객실지부 노조간부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고 술 마셨던 아지트였다.

김씨가 투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 대의원’을 했던 임아무개씨도 목숨을 잃었다. 업무 스트레스로 추정되는 투신사건이었다. 임씨는 노조가 깨진 후 회사 입장에 섰고 노무팀에 배치되기도 했다. “자아비판해야지.” 임씨는 회사와 회식하면서 이런 농담을 듣기도 했다. 임씨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을 쏟은 해고자 E씨에게 임씨의 가족은 ‘자기 일을 하면서 불행해했다. 노조 대의원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더라’고 전했다.

표적탄압에 공황장애 직전까지

회사의 일상적 괴롭힘은 한 직원을 ‘공황장애’ 직전까지 몰고 갔다. 과거 객실지부 출신들을 20여년 간 따라다닌 건 ‘감시, 따돌림, 저성과 낙인, 0호봉’이었다. C씨는 “회사가 직원을 붙여 나를 감시하고 동향보고를 하게 한 사실은 몇몇의 양심고백을 통해 들었다”며 “초기엔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을 동료도 없었다.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이런 처우는 10년 넘게 지속됐다.

▲ 2000년 노조 개혁파 승무원들이 대거 가입해 '객실승무지부'를 만들었을 때 쓴 로고.
▲ 2000년 노조 개혁파 승무원들이 대거 가입해 '객실승무지부'를 만들었을 때 쓴 로고.

“내가 암적인 존재라는 느낌이 계속 드니 잠잘 때마다 악몽을 꾸고 감당 못할 어둠이 숨을 조여와 잠을 깬 적이 많다. 그렇게 눈 뜨면 천길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이 들었고 내가 날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 외엔 없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C씨는 자신 같은 정신적 고통으로 회사를 일찍 그만 둔 동료가 많다고 했다.

이들 간에 “너도 0호봉이냐?”는 농담은 익숙하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통상 1년 마다 4호봉씩, 고과가 심하게 낮을 땐 1~2호봉씩 임금이 오른다. 과거 객실지부 출신들은 호봉이 오르지 않은 햇수가 더 많다. A씨는 “0호봉 숱하게 찍혔다. 비율로 치면 80% 정도”라고 말했다.

해고자 대부분은 2010년 회사로 돌아왔다. 당시 노조 간부·대의원 출신 50여 명 중 지금까지 회사에 남은 이는 10명 내외다. 모두 길게는 20년, 짧게는 8년 동안 고과 평점 C·D를 면치 못하는 ‘저성과자’로 일하고 있다. 한 승무원은 ‘30년차 대리’다. 이들 중 한 명에게 높은 고과를 매긴 팀장은 ‘쟤 누군지 몰라? 까라면 까’라는 질책을 듣고 고과를 다시 매겼다. 한 승무원은 신청없인 배치되지 않는 ‘국내전담팀’에 15년 넘게 배치돼 모멸감을 느꼈다.

“20년 전 객실지부가 생겼던 분위기와 비슷하다. 지금 체질이 개선되지 않으면 대한항공은 또 2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대의원을 했던 A씨는 현재 대한항공 직원들 사이로 번지는 촛불집회 행렬을 보며 ‘부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조금 더 확실하게 활동했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라며 “후배들이 더 즐겁고 기쁘게 일할 수 있는 때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