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소속 허아무개 기자가 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된 가운데 지정구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장이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지난해부터 회사가 위기관리에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노조도 이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허 기자에 대한 징계위원회는 다음 주에 열린다. 보통 조합원에 대한 징계위가 열리면 노조위원장이 징계위에 참여해 조합원을 대변한다. 하지만 필로폰 투약 혐의로 허 기자에 대한 기소가 예견돼 현실적으로 노조에서 조합원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책임을 지고 직을 내려놓기로 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 지부장은 지난 17일 “징계를 앞둔 조합원을 변호해야 할 조합원 대표로서 입이 백 개라도 조합원을 변호할 수 없는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다”며 “지부장의 직을 내려놓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불명예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된 점 머리 숙여 용서를 빈다”고 덧붙였다. 지 지부장 임기는 오는 6월 말까지였다.

▲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겨레신문사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겨레신문사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지 지부장은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을 비판했다. 지 지부장은 “우리 기자가 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된 사건은 충격 그 자체이지만 노조는 매번 재연되는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며 “회사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구성원들에게 대응이라며 ‘어떤 식으로든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문하는 데서 할 말을 잃는다”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경찰이 허 기자 모발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발표한 지난 16일 한겨레 사측은 구성원들에게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든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것이 이번 사안을 슬기롭게 풀어 가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회사는 판단한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일부 구성원이 SNS에 허 기자 관련 글을 올렸는데, 불필요한 논란이 커질 수 있으니 반성하는 차원에서 언급을 자제해달라는 취지의 메시지였다.

지 지부장은 이를 “회사의 전략적 빈곤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한마디로 조용히 넘기자는 말인데 참으로 부끄럽다”고 지적했다. 반면 조용히 넘길 의도였다면 경찰 발표 전후로 한겨레가 먼저 해명 및 사과문을 올렸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한겨레 노조는 지난해부터 사내에서 벌어진 잇따른 악재로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다. 지 지부장은 “이 시점에서 지난해 봄 비극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점을 용서 바란다”면서, 당시 경영기획실이 구성원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크다”,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다”고 재발 방지를 다짐한 것을 언급했다.

지 지부장은 “그러나 이 메일이 전부였다”며 “재발 방지를 위한 어떤 조직 관리 노력이나 실천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지난해 봄 비극’이란 지난해 4월에 있던 한겨레 동료 기자 간 상해치사 사건이다.

지 지부장은 경영진이 구성원 관리에 실패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양상우 한겨레 대표이사가 지난해 5월 창간 29돌을 앞두고 구성원들에게 “구성원들 마음의 건강을 보살피고 엄정한 조직 기강을 세우는 방안을 입안 중”이라고 말한 뒤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소셜미디어 준칙을 만든 것을 언급했다.

그러나 지 지부장은 “이런 조처로는 구성원들의 불안 요소를 다스리고 마음을 다잡는 데 실패했다는 게 이번 사건이 증언하고 있다”며 “이메일로 구구절절 수사만 늘어놓았을 뿐 행동도 실천도, 무엇보다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다.

지 지부장은 노조의 한계도 인정했다. 그는 “제 능력이 부족해 오늘 내부의 참상을 목도하게 된 것에 부끄럽고 조합원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음을 고백한다”며 “부디 현재 한겨레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경영진의 비상한 행동을 촉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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