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신뢰도가 곤두박질치던 2016년과 2017년 입사한 아나운서 11명이 있다. 그들은 MBC에서 기존 아나운서들을 선발할 때와 동일한 절차로 채용됐지만 신분은 정규직이 아닌 ‘1년 단위 계약직’이었다. 사회적 공기가 흉기나 다름없던 그때, 그들의 목소리는 시민들에겐 분명 ‘절망’이었다. 언론이라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 MBC는 누가 봐도 ‘적폐 언론’이었다.

정권이 교체되고 원래부터 불안했던 이들 입지가 더욱 불안해졌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언론 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다. 시대정신에 부응한 MBC 노조(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파업에 돌입했고 시간이 흘러 적폐 경영진을 몰아냈다. 

‘적폐 경영진’은 11명의 계약직 아나운서들에게 채용 공고에 명시된 대로 정규직 전환을 수차례 약속했다. 김도인 전 편성제작본부장과 신동호 전 아나운서국장이 그들이다. 신 전 국장은 “계약직의 ‘계’자도 꺼내지 마라. 내가 책임진다”고 호언장담했다.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김재철 사장 때부터 경영진들은 정규직 신입 사원의 노조 가입을 두려워했다. 특히 MBC 아나운서들이 시청자에 미치는 파급력을 경계했다. “문지애(전 MBC 아나운서) 같은 사람들이 (파업 때) 눈물을 보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 전임 경영진들은 ‘정규직 전환’을 볼모 삼아 계약직 사원들을 입맛에 맞게 부렸다. 그렇게 수년 간 굴러갔다. 계약직 사원들은 딱 들어맞는 ‘부품’이었다.

새 경영진이 들어섰고 ‘최승호 체제’는 본격으로 사내 개혁에 착수했다. 취임 전부터 최 사장은 “비정규직의 부당한 차별을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모두가 만족할 순 없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누군가는 배제됐고 그것도 ‘시대정신’으로 여겼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신분 보장과 정규직 채용 등에 관한 입장을 전달했다. 새 경영진은 기존 업무 평가가 아닌 ‘재시험’이라는 대안을 내놨다. 사실상의 신입 공채에 11명 모두 응시했다. 앞서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수백, 수천의 경쟁을 뚫고 채용됐다. 수능을 다시 치르는 심정으로 재시험에 응했다. 정규직 채용 가능성을 믿어서다.

그러나 11명 가운데 합격자는 딱 1명뿐이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MBC 아나운서’에서 ‘해직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지난주 재시험 결과를 통보 받고 사장실을 찾았으나 최 사장에게 답을 듣지 못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이번 대량 해고 사태는 현 MBC 경영진이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MBC 내부 비정규직을 시대적 요구에 걸맞게 해결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들도 자신들 목소리가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 기자회견을 한 이선영 아나운서(2017년 입사)는 “파업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큰 가책을 느낀다. 프리랜서들과 리포터들이 퇴사를 감내하고 파업에 동참할 때도 우리는 함께하지 못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선영 아나운서는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고 파업이 너무나 빠르게 진행됐다. 뒤늦게 참여하면 외려 숟가락만 얹는다, 무임승차한다는 비판이 나올까 두려웠다. 이 부분 정말 사죄한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참회했다. 이 아나운서는 “MBC 계약직 아나운서를 검색하면 ‘적폐 아나운서’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차라리 우리가 뼛속까지 적폐였다면, 진짜 적폐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보였다.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파업 기간 김도인 전 본부장 등 ‘적폐 경영진’들은 “경영진이 파업으로 교체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너희는 파업 생각은 말고 실력으로 (존재 이유를) 보여줘라”며 파업 불참을 종용했다. 이들은 파업에 참여하면 계약서상 계약해지권에 따라 해고될까 우려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공정방송 파업 종료 후인 지난 1월 사내에 “파업에 참여한 것이 빌미가 돼 다시 (아나운서) 방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선배님들의 후배가 영영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저희 존재에 대해 사죄드리고 싶다”며 반성문을 썼지만 호응은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외면이 “면목 없다”는 걸 안다. 

지난 파업에 참여했던 정규직 아나운서들도 수년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지독한 차별을 받았다. 지난 18일 해고 처분을 받은 최대현 MBC 아나운서는 과거 경영진 하에서 ‘아나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최대현 아나운서가 만든 문건은 MBC 아나운서 32명을 ‘강성’, ‘약강성’, ‘친회사’ 성향으로 3등급 분류했다. 강성·약강성으로 분류된 아나운서 13명 가운데 9명은 아나운서 업무와 연관성이 떨어지는 부서로 발령됐고 5명은 퇴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오상진, 문지애, 최현정, 김소영 등 MBC를 빛낸 아나운서들은 고통 속에서 회사를 떠났다.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 MBC 경영진이 채용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우리 해고는 ‘최대현 아나운서 해고’와 다르게 다뤄져야 할 것”이라며 “최 아나운서는 동료들 성향을 분석한 ‘아나운서 블랙리스트’ 작성자로 구 MBC의 부패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17년 8월 계약직 아나운서의 ‘공범자들’ 단체 관람을 막으려 했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최 아나운서 등과 어떤 관계였는지 외부에선 제대로 알기 어렵다.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아나운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김장겸·안광한 전 사장이 무분별하게 양산한 약자인, ‘비정규직’이다. 사회에 발을 내딛은 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은 초년생일 뿐이다. 우리는 적폐 아나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절박한 호소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새내기로 방송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그들의 얼굴에 그늘이 깊었다.

한편 MBC는 “회사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드라마 PD 5명, 예능 PD 8명, 아나운서 1명을 포함해 모두 14명의 계약직 사원 및 프리랜서를 정규직으로 특별 채용했다. 회사 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공개 선발한 첫 번째 사례”라고 설명했다. 

MBC는 “그러나 이번 채용에서 회사 내 모든 계약직 사원과 비정규직 사원들을 뽑을 수 없었던 점 안타깝게 생각한다. 오늘 퇴사한 아나운서들은 전문 계약직 사원들로 해고가 아니라 계약기간이 만료돼 퇴사했음을 알려드린다. 회사는 앞으로 필요한 인력의 경우 지속적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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