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南人)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어졌지만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것에서는 두 편이 같은 소리로 합세하여 마치 벌떼가 모이듯 하였다.’, ‘선대 임금의 정치를 제멋대로 헐뜯고 당론(黨論)만 내세우니 공사(公事)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문서가 쌓여갔지만 결재하여 처리할 줄 모르고, 주야 할 것 없이 떼 지어 모여서 자기들끼리 몰래 말하는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들 같았다. 또 모두 이때를 이용해 탐욕을 부렸는데,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염치가 없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 말은 1675년(숙종 1년) 6월4일 집권 세력인 남인의 행태에 대한 사관의 기록이다. 서인계 사관의 기록이긴 하지만 정파의 분열과 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음에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남인은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다. 남인이라면 선조 연간 동인에서 갈라진 퇴계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붕당이지만, 이 때의 남인은 이들의 후예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북인의 후예들이다. 북인은 어떤 세력인가. 바로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둘러싼 세력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과정을 살펴보자.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 세력 상당수가 제거되었다. 이후 대북은 광해군과 함께 왕의 친형 임해군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후궁이었던 생모를 왕비로 추숭(追崇)했고, 9살의 영창대군을 쪄 죽였으며, 계모 인목대비의 지위를 박탈하고서 유폐했다. 삼강오륜이라는 성리학적 윤리관을 철저히 저버린 대북과 광해군의 무리수가 결국 퇴계학파 남인의 동조를 얻은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그 결과 광해군이 쫓겨나고 그 친위 세력인 대북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종식을 고하였다.

인조 이후 집권 세력인 서인은 ‘도(道)가 군주(君主)보다 높다(道高于君)’는 이념을 바탕으로 왕실의 예법(禮法)도 일반 사대부와 똑같이 적용하며 왕이나 왕실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의 이러한 성향은 왕실의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왕권을 확립하려 한 왕실 세력에 의해 서인이 정권에서 제거 되고, 이를 대체할 세력으로 남인이 등장했다. 이때 남인은 ‘북인’이라는 이름으로 조정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퇴계의 적통제자 정구(鄭逑)와 사승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남인의 이론가로서 등장했던 허목(許穆)과 윤휴(尹鑴), 원로나 중진급 인사였던 홍우원(洪宇遠)과 이하진(李夏鎭), 이옥(李沃) 등이 모두 소북의 후예들이었다.

▲ 숙종 연간 대표적 남인 허목 초상화. ⓒ 국립중앙박물관
▲ 숙종 연간 대표적 남인 허목 초상화. ⓒ 국립중앙박물관
50여 년 만에 집권한 소북 세력의 후예인 남인들은 집권한 뒤 곧장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두고서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져 정쟁을 일삼았고, 종친과 결탁하여 왕권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탁월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와 외당숙 김석주에 의해 6년 만에 다시금 정권을 서인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남인은 희빈장씨 및 조대비(인조의 두 번째 왕비) 세력과 결탁하여 재기를 노렸다. 마침 숙종이 희빈장씨 소생의 왕자를 세자(世子)가 될 왕자라는 뜻을 가진 원자(元子)로 결정했다. 원칙과 명분을 중요시한 송시열 등의 서인의 반발을 예견한 정치적 승부수였다. 숙종은 다시금 정권교체를 통해 남인에게 정국을 맡겼고, 그들로 하여금 서인을 공격하게 하면서 서인가문 출신의 국모(國母)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기까지 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인정권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국혼을 파기한 것이다. 남인으로서는 독배(毒杯)를 든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숙종은 다시금 서인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이후 재야 세력이 되어버린 남인은 서인에 의해 국모에 대한 신하로서의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죄인이라는 뜻의 ‘명의죄인(名義罪人)’이라고 공격받으면서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일군의 정치 세력으로서 조정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앞서 대북 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 남인 스스로 폐족(廢族)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역사는 반복하는가? 지금 우리 정치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명분과 의리는 무엇일까. 바로 헌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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