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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 연 민주화 박정기 선생이 완성해 갔다”

유가협과 대학생, 시민, 국회의원 참석 줄이어

2018년 07월 31일(화)
박서연 기자 psynism@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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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군이 민주화의 문을 열었고 박정기씨가 완성해 나갔습니다.”

지난 28일 별세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의 노제가 31일 서울 중구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노제에는 낮 최고 기온이 38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 300여명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 이소선합창단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박정기씨를 기리는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이소선합창단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박정기씨를 기리는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28일 별세한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의 영정이 31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28일 별세한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의 영정이 31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박정기씨의 영정사진과 유해는 이날 오후 3시에 시청광장에 도착했다. 고 박정기 선생은 지난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숨져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 박종철 열사의 부친이다.

노제에는 함께 자식을 잃은 아픔을 나눠오고 활동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과 대학생, 시민,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 시민들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 박정기씨의 노제를 지내기 위해 모여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시민들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 박정기씨의 노제를 지내기 위해 모여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이귀임(70)씨는 “92학번인 우리 아들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 아들이라고 예외였겠냐. 96년에 순천교도소에 들어가 만 2년을 복역하고 나왔다”고 말문을 뗐다. 그러면서 이씨는 유가협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내 아들이 구속돼 있으니까 응어리를 풀 곳을 찾게 됐다. 유가협에 들어가서 박종철군을 잃은 아버지 박정기씨와 동지애를 느꼈고 어디에 말 못 할 거를 유가협 안에서 다 말하고 응어리를 풀었다. 여기서는 남의 집 자식 일이 곧 내 일이었다. 유가협 구성원들에게 정이 갔다. 나는 우리 아들 덕분에 세상을 바로 보는 법을 알게 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날 박정기 선생의 노제는 민주시민장 장례위원들의 도움으로 치러졌다. 고 박종철 열사의 후배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친구뿐만 아니라 일반 대학생들도 장례위원으로 참석해 노제를 도왔다.

▲ 고 박종철 열사의 후배인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민주시민장 장례위원으로 참석해 노제 돕고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고 박종철 열사의 후배인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민주시민장 장례위원으로 참석해 노제 돕고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오재원(18·서울대 언어학과)씨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다 보니까 직속 선배인 고 박종철 선배 이야기를 입학하면서부터 많이 듣게 됐다. 과방에는 선배의 사진이 있고 학교 안에는 동상도 있다. 주변에 항상 고 박종철 선배를 보고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오늘 하루 선배 아버지의 장례식을 꼭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신재용(24·서울대 체교과)씨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박종철 선배 아버지의 장례식에 꼭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가신 선배의 안타깝지만 명예로운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30년 전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런 선배를 기리기 위해 우리는 매년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리는 추모제에도 참석한다”라고 밝혔다.

윤아무개씨(20·한국항공대학교 항공운항과)는 “지난해 영화 1987을 보고 박종철 열사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 역사 등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배우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16년 촛불집회 당시에는 고3이었는데도 집회에 참석했었다. 고3이어서 공부해야 했지만, 집회를 하는 국민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도 박정기 선생을 기리기 위해 노제에 참석했다.

장기표(72·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는 과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의 관심을 보여 서울대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러줬다. 장씨는 “박종철 열사는 민주화의 문을 열고 그의 아버지 박정기씨는 아들이 열어놓은 민주화운동을 완성하신 분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아들의 죽음 이후 노동 운동을 해왔듯이 박정기씨도 살아생전에 의미 있는 많은 일을 하다가 가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아버님을 여러 거리 현장에서 많이 뵀다. 그동안의 박정기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박종철 열사 역시 서울대 학생이 아닌 87년 민주화,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볼 수 있다. 87년 6월항쟁에 참여한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마음에는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또 박종철이 아닌 다른 언어로 모두의 마음에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은 앞으로 박정기 선생님처럼 정의로운 서울교육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 차려진 박정기씨 분향소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31일 서울 시청광장에 차려진 박정기씨 분향소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박정기 선생은 노제가 마무리된 뒤 아들 박종철 열사가 묻힌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 14일 새벽 관악구 서울대 인근 하숙집 골목에서 강제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에 고문을 받다 질식해 숨졌다. 부친 박정기씨는 지난달 28일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한 요양병원에서 89세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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