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왼쪽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136년간 외국군대가 주둔했던 용산기지 개방

[아침신문 솎아보기] 용산 미군기지 일부 시민에 개방… 욕망의 끝판왕 용산, 올바른 생태공원 돼야

2018년 11월 03일(토)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공유하기

URL복사URL복사

URL 복사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AD FREE

용산은 조선 왕이 있는 궁궐과 가깝고 한강 수로와도 가까워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외국 군대의 단골 주둔지였다. 13세기 말 고려 때 쳐들어온 원나라 군사도 용산에 주둔해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136년간 외국군대가 주둔했던 용산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청나라 군사가 용산에 주둔했지만 13년 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용산엔 청나라 군사 대신 일본군이 주둔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도 용산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동원됐다. 명성황후 시해는 미우라 일본 공사가 용산에 살던 대원군의 왕궁 행차 경호를 위해 일본군을 붙이면서 시작됐다. 대원군은 1895년 10월8일 새벽 3시 일본군대의 호위를 받고 용산을 출발했다.

일본은 친일파 이지용과 맺은 1904년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 땅 300만평을 차지하고 그 중 115만평은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그 곳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서 일본군 2만명이 주둔했다. 용산은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통치하고 만주 침공을 위한 후방기지가 됐다.

용산에 일본군 주둔은 1895~1945년까지 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이후엔 미군이 다시 반세기 넘게 주둔했다.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가 세워졌지만 아직도 미군 일부가 용산에 남아 있다.

▲ 한국일보 3일자 2면
▲ 한국일보 3일자 2면

용산 미군기지 일부 시민에 개방

어제(2일) 용산 미군기지 일부가 시민에게 개방되자 오늘 아침 대부분의 신문이 그 사실을 전했다. 한국일보는 3일자 2면 머리에 ‘114년 만에… 용산 기지가 열렸다’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한국일보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기준으로 일본군과 미군의 연이은 주둔기간 ‘114년’을 제목에 달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으로부터 계산하면 136년만이다.

다음은 주요 일간지 3일자 용산기지 개방 기사다. 

경향 8면    114년만에 빗장 열린 용산기지
한겨레 1면 114년 만에 빗장 푼 용산 미군기지
한겨레 6면 용산기지 첫 버스투어, 위수감옥에 가자
한국 2면    114년만에… 용산기지가 열렸다
조선 12면  114년만에 문 연 용산기지, 버스 타고 둘러보세요
동아 25면  114년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온 용산 미군기지

외국군 주둔으로 한세기가 훨씬 넘게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었던 용산 미군기지가 일부 개방을 시작했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용산 미군기지 내 주요 장소를 버스를 타고 둘러보도록 ‘용산기지 버스투어’를 연말까지 6차례 진행한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번 버스 투어는 ‘식민과 냉전의 상징’이던 용산기지가 미래 평화 명소로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용산기지에 남산과 한강을 잇는 생태공원을 만들어 평화를 위한 교훈의 장소로 물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용산기지 주변은 2006년 5월 경찰이 투입돼 강제철거가 시작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과 함께 또다른 탐욕을 키워왔다. 100년 넘게 외국군대의 군사기지였던 용산은 오세훈 서울시장 때 높이 620m 150층 초고층 랜드마크 타워와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발표로 또다른 탐욕의 화신이 됐다. 용산은 외군군대가 채 물러나기도 전에 부동산 자본이 주둔해 버린 셈이다. 신라 금관을 닮았다고 광고했던 150층 초고층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수많은 아파트 건설계획이 잇따랐다. 세입자에겐 평균 2500만원의 죄꼬리만한 보상비를 던져주고 내쫓는 철거가 시작됐고, 그 욕망의 끝은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로 곧장 이어졌다.

욕망의 끝판왕 용산, 올바른 생태공원 돼야

1976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썼던 당시 월간 ‘신동아’의 조세희 기자는 2009년 용산참사를 보고 “난쏘공이 목격한 철거는 70년대 산업화 과정에 도시 빈민을 추방이었는데, 2009년 용산에선 중산층까지 철거 대상이 됐다”고 했다.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이사도 ‘녹색평론’ 2009년 7~8월호에 “난쏘공이나 영화 똥파리에 나오는 철거민은 도시 빈민이지만 용산 철거민은 중산층”이라며 가진 자들이 탐욕이 이젠 중산층까지 약탈해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고 썼다.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10년. 용산기지를 둘러싸고 이미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들어선 마당에 앞으로 만들어질 생태공원은 이들 아파트의 정원이나 놀이터가 될 공산이 크다. 서울시는 앞으로 용산기지 개발에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지난달 숨진 허수경 시인도 2011년 ‘열린 전철 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라는 시에서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 소경”이었다고 고백한다. 정치가, 행정이,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문과 눈을 뜨게 했으면 한다.

네이버에서 이정호 기자의 기사를 구독해 주세요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전체선택후 복사하여 주세요. 닫기

2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