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 삼성그룹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 재판이 오는 25일 1심 선고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난 2008년 삼성 특검은 ‘봐주기 수사’, 1·2·3심 선고는 ‘면죄부 판결’이란 평가를 받아온 점에 비춰, 이 사건 선고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난 3개월 간 공판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 본 미디어오늘은 유·무죄 판결만큼 이 재판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미디어오늘은 삼성 1심 재판이 우리 사회에 던진 교훈을 선고 전까지 연속기획으로 다룬다. (편집자주)

싣는 순서
① ‘삼성공화국’ 총수를 구속한 최초의 수사기관


“다 걸었네. 다 걸었어.”

2017년 1월16일 오후 2시 서울 대치동 대치빌딩 14층 브리핑실, 이규철 전 특검보의 입을 바라보던 기자들 사이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뇌물공여 총액으로 얼마를 영장에 적시했느냐”는 질문에 “약속한 금액을 포함해 총 430여 억원”이라는 답이 나온 직후였다. 1월16일은 박영수 특검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첫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한 날이었다.

당시 기자들이 추정한 ‘최대’ 액수는 440억 원이었다.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삼성그룹의 정유라씨 승마지원 금액,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을 더한 값이었다. 특검의 수사의지에 귀추가 주목되던 때, 특검은 특정된 지원금 모두를 뇌물로 봤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 간 수사기관의 ‘삼성 봐주기’를 학습해왔다. 총수일가 경영권 승계 작업의 핵심인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매각’,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매각’ 등은 1999년부터 수 년 간 여러 차례 고발이 진행됐으나 2008년 삼성 특검이 개시되기 전까지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과제를 받은 2008년 삼성특검(조준웅 특별검사)은 각종 축소 수사로 “법치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오명까지 입었다.

2017년 특검은 이와 정반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여론을 가늠할 수 있는 언론보도, 시민사회단체의 각종 기자회견 및 성명서 등을 종합하면 수사 범위, 혐의 적용, 신병 처리, 공소 유지 등 모든 지점에서 ‘과거와 달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통령 탄핵 국면이 특검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낸 사실을 간과할 순 없다. 그럼에도 결과만 놓고볼 때 한국 사회는 2017년 특검으로 ‘봐주기 논란에 휩싸이지 않은’ 최초의 삼성 수사를 보게 된 셈이다.

▲ 박영수 특별검사가 지난 3월6일 서울 대치동 대치빌딩 브리핑실에서 특검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박영수 특별검사가 지난 3월6일 서울 대치동 대치빌딩 브리핑실에서 특검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혐의 은폐 시도·‘거짓말’ 진술까지 법정으로 넘겨

선례인 2008년 삼성특검은 핵심 수사 대상을 간과했다. 2008년 특검의 수사 대상은 삼성그룹의 조직적 비자금 조성 건이었다. 당시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인 구조조정본부는 임직원들의 계좌를 도용해 회사 자금을 빼돌려 총수일가에 차명재산을 만들어줬다. 이는 총수일가의 계열사 지분 매입 자금, 정·관·법조계 등 불법 로비자금 등에 활용됐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알려지게 된 사실이다.

조준웅 특검은 비자금 조성 경위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특검이 확정한 비자금 규모도 486명 명의의 계좌 1199개였으나 이는 삼성이 제출한 401명의 827개 계좌 목록과 큰 차이가 없었다. 차명계좌에 입금된 자금은 “이건희 회장의 상속 재산”이라고 말하는 삼성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 국세청이 자료협조에 응하지 않는다거나 해외법인 금융계좌 추적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삼성화재에서 조성된 비자금의 경우 삼성화재 사장 개인의 횡령 혐의로 축소해 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이 회장 조세포탈 혐의도 일부만 기소했다.

2017년 특검은 금전 지급이 확인된 건은 모두 뇌물 혐의로 걸었다. 이 부회장 공소장에 적힌 뇌물 액수는 약 433억 원이다. △정유라 승마 지원 약속금액 213억 원(실지급액 77억9735만 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 원 △영재센터 후원금 16억 2800만 원이다.

뇌물공여 외 혐의도 최종 책임자를 명시해 법정으로 넘겼다. 특검은 이 부회장에 대해 횡령,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그리고 위증까지 적용했다. 특검은 뇌물로 지목된 실지급액 298억 2535만 원 모두를 이 부회장이 횡령해 각 계열사에 피해를 입혔다고 특정했다. 특검팀은 법정에서 “(각 계열사엔) 수많은 주주들이 따로 있다. 그렇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특검은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법령에 위반해 국외로 도피시켰다며 삼성그룹이 정씨에게 지급한 승마지원액 78억 9430만 원에 ‘재산국외도피’ 죄를 적용했다. 78억 원이 실질적으로 삼성이 최씨에 준 ‘외화 증여’임에도 허위 예금 거래신고서를 작성해 각종 신고 의무를 둔 외국환거래법을 피해 재산을 독일 계좌로 옮겼다는 것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범죄 은폐 시도’에도 혐의를 적용했다. 삼성전자와 최씨 소유 회사 코어스포츠가 맺은 용역계약이 정씨 1인 승마 지원을 가리기 위한 허위 계약으로 보고 “범죄수익의 발생 원인에 관한 사실을 가장했다”고 특정했다. ‘말 세탁’으로 알려진 삼성 측과 정씨 덴마크 승마코치 간 말 매도계약과 용역계약 모두 범죄수익 처분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계약’이라고 판단, 특검은 범죄수익 처분에 관한 사실을 가장한 범죄라 규정했다. 특검팀 김영철 검사는 이와 관련해 “잘못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반성이지 잘못을 가리기 위해 또다른 잘못을 하는 것은 범죄라 생각한다”고 법정에서 밝히기도 했다.

2008년, ‘기계적 평등 안된다’며 삼성 총수 불구속 처분

조준웅 특검은 “본건 피고인들을 반드시 구속해 재판해야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이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는 “개인적 탐욕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배임, 조세 포탈 범죄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경쟁이 극심한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들었다.

조 특검은 이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면서도 “그러나 평등한 법적용이 법 적용을 받는 대상이 가진 개별적 특수성이나 시대적 상황 등은 전혀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 김인주 전 전략기획실 사장의 배임 관련 이득액은 약 2500억 원, 조세포탈 금액은 약 1128억원이었다.

2017년 특검은 삼성그룹 총수를 구속시킨 한국 최초의 수사기관이 됐다. 특검은 지난 1월16일 이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19일 기각됐다. 특검은 추가 수사를 진행, 2월14일 2차 구속영장을 청구해 17일 영장을 발부받고 이 부회장을 구속시켰다. 특검은 1월16일 브리핑에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사항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삼성이 아니라고 하니 아니다” vs “눈 가리고 아웅말라”

2008년과 2017년 특검은 삼성그룹 관계자 ‘허위 진술’ 의혹에 대해서도 상반된 태도를 취했다. 박영수 특검은 이 부회장에게 징역 12년 중형을 구형하며 “피고인들이 범행을 부인하며 그룹 총수인 이재용 피고인을 위해 조직적으로 허위 진술을 하며 대응했다”고 지적했다.

특검팀 파견검사들 또한 3개월 간의 법정 공방에서 삼성 측 진술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조상원 검사는 지난 4일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 최종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며 “승계작업이 완성됐다는 삼성 측 주장을 고려해도 모든 권한은 이재용 피고인에게 집중됐다”고 반박했다.

특검은 그룹 총수를 보호하기 위한 최 전 실장의 ‘총대메기’ 정황도 지적했다. 최 전실장은 특검 수사를 받을 때부터 자신이 그룹 내 최종결정권자라고 주장해왔다. 박주성 검사는 지난 4일 법정에서 “교통사고 경우에도 운전자 바꿔치기가 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물증이 없어야 한다”며 “비유를 들자면 자동차 운전대에 지문 같은 여러가지 객관적 증거가 명백하다. 독대 당사자로서 최초로 승마 지원 요구를 받은 게 이재용 피고인이므로 운전자 바꿔치기, 총대메기 등은 이 사안에서 인정될 수 없는 주장으로 보여진다”고 주장했다.

반면 2008년 삼성 특검은 삼성 측 피고인·참고인 진술에 의존했다. 특검은 각종 비자금 조성 경로에 대해 삼성 측이 부인하는 진술을 근거로 문제 삼지 않았다. 허위진술 사실이 확인됐으나 차후 당사자들이 ‘허위진술을 강요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는 이유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 등이 증언한 정·관·법조·언론계 불법 로비도 당사자들이 부인하고 김 변호사의 진술이 다소 엇갈린다는 이유로 ‘실체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2017년, 사회 지도층 ‘검은 유착’ 적극 공개

우리 사회 권력층과 재벌의 유착은 2008년과 2017년 특검 모두에서 확인됐다. 2008년의 경우 삼성의 불법로비는 공식 수사 대상이었다. 2017년 특검은 뇌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간접 증거로 로비 정황을 확인했다. 두 수사기관의 수사의지는 달랐다.

2008년 특검은 제보자의 신빙성을 문제 삼고 불법 로비 혐의를 덮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2007년부터 삼성의 ‘관리 대상 고위 공직자’를 수회 폭로했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 이종백 전 국가청렴위원장, 이귀남 전 대구고검장, 이종찬 전 민정수석, 김성호 전 국정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임채진 전 총장은 2001년 서울지검 2차장때 직접 관리대상 명단에 넣었고 구조본 인사팀장인 부산고 선배 이우희가 관리했다” “2004년 초 이우희가 나에게 ‘임채진이 다음 서울지검장이다’라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조준웅 특검은 임 전 총장, 이 전 팀장 등 당사자가 사실을 부인하고 김 변호사의 진술 일부가 모순된다는 이유로 “주장 자체에 신빙성이 없어 더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가 폭로한 나머지 십수명의 고위공직자도 대동소이한 이유로 조사가 중단됐다.

그러나 진술이 어긋나지 않는 경우에도 수사의지는 발휘되지 않았다. 김 변호사 양심고백 후 이용철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이경훈 당시 삼성전자 사내 변호사로부터 500만 원이 든 쇼핑백을 전달받고 반환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2008년 특검은 “이경훈 변호사는 미국 체재 중으로 연락이 불가능하고 삼성측 인사가 금원을 교부했다는 아무런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이경훈의 귀국시까지 진상 확인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영수 특검팀과 삼성은 미전실 간부와 유관 고위공직자의 만남을 두고 입씨름을 했다. 특검팀은 부정한 로비라 주장했고 삼성은 정당한 경영활동이라 규정했다. 김종중 전 미전실 사장은 공정거래위원회 내 ‘삼성물산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 결정 건이 임박할 무렵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을 만났다. 이후 공정위 결정은 삼성 측이 애초 요구했던 안으로 결정됐다.

특검팀이 법정에서 공개한 증거는 삼성그룹 뇌물을 둘러싼 국정농단 경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장충기 전 사장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문자메시지는 우리 사회 지도층들의 유착관계를 드러냈다. 정·관·법조·언론계를 통틀어 고위 공무원 및 간부들이 삼성 미전실에 각종 인사·후원·협찬 청탁을 한 문자가 다수 발견됐다.

박영수 특검은 이번 삼성그룹 뇌물 혐의 사건을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이자 정경유착 범죄라고 언급했다. 박 특검은 지난 7일 논고문에서 “이 사건 범행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범죄로 국민주권의 원칙과 경제 민주화라고 하는 헌법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며 “우리나라 역사에 뼈아픈 상처이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힘으로 법치주의와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2008년 특검은 수사결과 발표 시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해 “재벌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현실적 여건과 법적 제도적 장치간의 괴리 또는 부조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당시 특검은 “이 사건 범죄는 재벌그룹의 구조조정본부라는 조직을 통해 소속 기업의 지배구조를 유지 관리하는 과정에 장기간 내재돼 있던 불법행위를 현 시점에서 엄격한 법의 잣대로 재단해 형사상 범죄로 처단하는 것”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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