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토론으로 사상 검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1997년 10월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극우 월간지 ‘한국논단’은 대통령 후보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름하야 ‘대통령 후보 사상 검증 토론회’. 대놓고 사상 검증을 하겠다고 후보들을 불렀으니 편파성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냥 웃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의 향연이었다. 사회를 맡은 발행인 이도형씨는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에 용공 의혹을 제기했다. 

“황장엽씨를 직접 만나보니 ‘김정일이 김 총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던데 나를 설득해보라”, “북의 독재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남북한의 상호 군축이 아닌 북한만의 군축을 촉구할 수 있느냐”, “한국논단에 게재된 ‘거짓말쟁이, 친공 대통령은 안 된다’는 기사를 반박할 수 있느냐” 등의 발언은 자칭 보수의 수준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토론을 마치고 이씨는 “오늘 토론으로 사상 검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지난 2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토론회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 참모들이 다 반대했다. 그런데 제가 그때 얘기했다. 하셔야 한다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고 술회했다. 사상 검증이 통과 의례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지난 1월15일 오후 서울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린 고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도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사진제공: 문재인 전 대표 측)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지난 1월15일 오후 서울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린 고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도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사진제공: 문재인 전 대표 측)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노무현 후보 처가의 사상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 고 권오석씨가 한국전쟁 당시 좌익 활동을 한 혐의로 형을 살았다는 이유였다. “그럼 나더러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사상 검증이라는 촌극을 비트는 효과를 낳았으나 이 나라 반공주의는 연좌제를 씌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대선 때마다 후보들을 옥죄는 ‘반공주의 프레임’에 진짜 검증이 설 자리는 사라지곤 했다. 2012년 대선에서 보수 언론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확고한 안보관이 강점이라고 추켜세웠다. 재임 기간에도 안보관과 강경한 외교에서 만큼은 성과를 남겼다고 떠들었다.

정작 박근혜는 비선실세 최순실에게 안보 기밀 문건을 넘기기 여념 없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힘겨루기에 한국은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파면은 ‘반공주의 프레임’에 대한 사망 선고가 돼야 했다.

수년 전 일화를 꺼낸 까닭은 2017년 조기 대선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상 검증 토론회’ 따위는 사라졌으나 ‘반공주의·안보 프레임’은 견고하다.

김정남 암살 사건을 1973년 박정희 정권의 DJ 납치 사건에 비유했다가 입길에 오르내린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논란은 대표적 사례다.

비난은 정 전 장관 측이 몸담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향했다. 팩트에 어긋난 발언도 아니었고 고문·납치 등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은 지울 수 없는 역사임에도 언론은 문 전 대표를 난타했고 결국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해명을 받아냈다.

‘사드 배치’에 대한 입장 선회나 지나친 안보관 강조 역시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결과다.

문 전 대표가 지난 19일 오전 KBS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특전사로 군 복무하던 시절 사진을 공개한 것도 연장선에 있다. 

약점이라고 지적받은 안보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꺼낸 것이지만 “반란군의 가장 우두머리였던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는 발언은 광주 경선을 앞두고 긁어 부스럼이 됐다.

“과도한 안보 콤플렉스에 걸린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는 안희정 충남도지사 측의 비판은 ‘안보 콤플렉스’를 비판한 것처럼 보이나 반공주의에서 비롯한 상대 후보 흠집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흘려 들어선 안 된다. 반공주의 프레임에 갇혀 치고받고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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