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에서 하차한 이후 나는 모든 업무에서 배제된 채 회사 모처 조명기구 창고에서 업무 발령을 기다리며 대기 상태로 지내왔다. 그래도 나는 그간의 큰 책무를 내려놓고 개인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파업에 반대했던 내 동료 언론인은 세상이 잘 모르는 부당한 일들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애석한 일이다. MBC 안에서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을 수 있는 자유는 사라졌다.”

배현진 전 MBC 앵커는 9일 자유한국당 입당 환영식에서 그동안 MBC에서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토로했다. 지난 2012년 전국언론노동조합 170일 MBC 파업 도중 노조를 탈퇴하고 뉴스데스크 앵커로 복귀한 이후 ‘배신자’로 낙인찍혀 각종 음해와 공격에 시달려 왔다는 하소연이다.

배 전 앵커를 기억하는 상당수 국민과 언론인들까지 그가 지난해 말까지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아나운서’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지난 7일 회사에 사직서를 내기 전까지 ‘기자’ 신분이었다. 지난 2008년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2012년 파업 등 과정을 겪으면서 동료 아나운서들과 관계가 틀어졌고, 2014년 본인의 희망에 따라 기자로 전직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MBC 경영진들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력과 삼성 등 자본권력에 긴밀하게 유착하고 이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내부 직원들을 무차별 해고하거나 징계·전보 조치 등으로 온갖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했다.

지난해 박근혜씨 탄핵 전까지도 '친박뉴스'라고 비판받았던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배현진 전 앵커. 사진=2017년 2월28일 뉴스데스크 앵커화면 갈무리.
지난해 박근혜씨 탄핵 전까지도 '친박뉴스'라고 비판받았던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배현진 전 앵커. 사진=2017년 2월28일 뉴스데스크 앵커화면 갈무리.
배 전 앵커는 그런 모든 ‘적폐’와 ‘악행’들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했다. 외려 뉴스까지 사유화하려는 경영진의 ‘입’이 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배 전 앵커는 지금 각종 위법 행위로 검찰에 기소된 전직 경영진들과 ‘한패’였다. 이런 적폐 인사들은 진작 MBC에서 축출당하고 법적인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배 전 앵커 등 이른바 부역 언론인들은 ‘개인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그는 뉴스데스크에서 하차하고도 아나운서가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여전히 보도본부 소속이다. 최승호 사장 취임 이후 새 MBC 경영진들은 배 전 앵커에게 기자로서 업무를 주지 못했다. 동료 기자들이 부당하게 보도본부에서 쫓겨나고 본연의 업무에서 배제됐을 때 이를 외면하고 경영진 편에 섰던 그와 일하고 싶은 동료들이 있길 바라진 않았을 거다. 그 역시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하차한 후 보도본부가 아닌 다른 직군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업무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조명기구 창고’는 지금은 MBC 보도본부 사무실이다. 지난 경영진이 했던 것처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수원 등 경인지사로 내쫓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보도본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요구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던 앵커직을 더 오래 하지 못했을 뿐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파업에 반대했던 동료들이 부당한 일들을 온몸으로 당하고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렸어야 한다. 그가 자신을 음해·공격했다는 동료 기자·PD·아나운서들은 지난 9년간 회사의 부당한 인사 조치에 저항하고 수없이 좌절하면서 싸웠다. 햇수로는 6년, 2000여 일이 넘도록 해고된 채 월급 한 푼도 못 받고, 항암 투병까지 했던 동료도 있었다. 배 전 앵커는 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애석해 본 적이 있는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9일 한국당에 입당한 배현진 전 MBC 앵커에게 태극기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9일 한국당에 입당한 배현진 전 MBC 앵커에게 태극기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어쨌거나 그가 ‘자유’를 찾아 자유한국당에 입당했다면 이 역시 자신의 정치적 자유다. 하지만 “내가 몸담았던 MBC를 포함해 공영방송이 진정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내가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이미 MBC는 정치권력의 외압에서 벗어나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국민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가 바로 세우겠다는 MBC가 ‘김재철 체제’ 이후 공영방송 암흑기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동료 언론인들을 포함해 모든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날 배 전 앵커와 박근혜 정권에서 해임된 길환영 전 KBS 사장의 한국당 입당과 관련해 성명을 내고 “역사를 잊은 정당에게 미래는 없다”고 질타했다. 마찬가지로 공영방송 흑역사를 잊은 언론인도 미래는 없을 거다.

언론노조는 “자유한국당이 정권을 갖고 있던 지난 10년 동안의 일을 모른다고 할 것인가. 그동안 힘겹게 공영방송 KBS와 MBC를 지키기 싸워왔던 구성원들과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염원해 온 국민 앞에서 한국당 정권 시절의 ‘KBS 사장’과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려 하느냐”며 “한국당이 지금처럼 소위 ‘언론장악’을 운운하며, 길 전 사장과 배 전 앵커에 대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을 통해 “두 사람은 세월호에 대한 왜곡 보도를 지휘하거나 왜곡 보도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사람”이라며 “배 전 앵커는 박근혜의 국정농단 보도 당시에도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엉뚱한 보도로 실소를 자아냈다”고 꼬집었다.

김동균 정의당 부대변인도 지난 8일 논평에서 “적폐의 아이콘들이 적폐의 본진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놀랄 일은 아니다”며 “자숙해야 마땅할 두 사람이 정치권 입성으로 인생 역전을 해보겠다는 처신이 매우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 부대변인은 “어쨌든 적폐정권의 주구로 활약하던 인물들이 설 자리를 잃자마자 끌어오는 의리와 국민이 적폐 청산을 요구하든 말든 즈려밟고 가겠다는 줏대는 눈여겨볼 만하다”면서 “다만 한국당은 적폐 인사들을 잔뜩 태우고 적폐대로를 쭉 달리겠다는 망나니 폭주 정신으로 국민의 선택을 기대하진 말기 바란다. 적폐대로의 끝에는 낭떠러지뿐인 만큼 종국에 후회는 없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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