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이런 저런 지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만담이 유행한적이 있다. "싸움 제일 잘하는 동네는? 대치동", "롯데팬이 많은 동네는? 사직동" 따위의 조크다. 그 중에는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네는?”이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답은 “방학동!” 이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이 조크가 유효할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개학을 맞이하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지나간 방학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학교에 나와서 너무 즐겁다는 듯이 은 해맑기 그지없다. 방학 중에 무상급식이 끊어져서 배를 곯는 아이들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강남 3구의 학생들일수록 다가오는 개학을 즐겁게 맞이한다.

왜 그런가 물어보면 학생들은 엉뚱하게 "개학을 하면 학교에 나가기 때문에 좋아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기특할수가! 하지만 그 다음 대답이 실망스러운데, "그럼 학원 안 가도 되잖아요."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특히 수도권 학생들에게 방학은 곧 학원가는 시간이 길어지는 기간에 불과한 것이다. 방학때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아침 열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학원에 다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학기 중에 아홉시부터 네 시까지 학교 다니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학교나 학원이나 아이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기는 마찬가지고, 아이들을 억압하고 꿈을 죽이는 곳이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학교에서 보내는 일곱 시간과 학원에서 보내는 일곱 시간은 상당히 다르다.

   
▲ 개학을 맞아 학생을 반기는 선생님 ⓒ 연합뉴스
 

학교가 아이들에게 딱히 즐거움을 주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음악, 미술, 체육 시간도 있고, 스포츠클럽 시간도 있다. 이런 저런 창의적 체험 시간도 있고, 점심시간도 한 시간 정도로 길며, 선생님들이 매시간 꽉꽉 채워서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교사 특성에 따라 자유로운 탐구활동을 하는 시간도 있고, 연극이나 만화를 만드는 수업을 하는 시간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대할 때 지켜야 할 범위와 한계를 비교적 잘 인식하고 있는 편이다. 아직도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체벌이나 언어폭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들이 아직 많이 있지만 이들도 체벌을 못해서 교권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불평을 할지언정 그 범위와 한계를 함부로 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학원은 그렇지 않다. 서울지역 학생들 둘 중 하나가 학원에서 체벌을 받았고, 42%가 욕설이나 모욕적인 폭언을 들었다고 응답할 정도로 학원의 체벌은 일상적이다. 더구나 체벌의 이유나 과정도 떨어진 점수 혹은 틀린 문항 수만큼 맞는 등 80년대 학교에서나 있었을 법한 것들이다. 성적과 관련하여 심각한 수준의 조롱이나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교육청은 학원에서 체벌을 할 경우 행정 제재는 물론 형사고발까지 하겠다며 공문을 날리지만, 학생이나 학부모가 신고하거나 민원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공문구나 마찬가지다. 학원에서의 체벌에 관한한 학부모는 지극히 관대하며, 심지어 학생들도 학원에서 맞는 매는 당연히 여기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조금이라도 체벌을 받으면 항의전화, 민원 등이 빗발치는 우리나라지만 학원에서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꾹꾹 감내하는 까닭은 오직 성적 때문이다. 학원은 ‘성적 이외의 이유’로 체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학교는 ‘성적’을 이유로 체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http://www.nocutnews.co.kr/news/1051902).

사정이 이러니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방학이란, ‘성적 향상’이란 명분으로 온갖 비인격적인 대우를 감내해야 하는 인권상실 기간이며, 자기 발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선행학습 따위를 하루 종일 해야 하는 두뇌 학대기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새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던 방학,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방학중학교라는 농담을 하며 웃게 만들던 방학을 앗아갔다.

방학은 문자 그대로 배움을 내려놓는 기간이다. 이는 배움을 중단하는 기간이란 뜻이 아니라, 더 큰 배움을 위해 심신을 잘 다듬고 준비하는 기간이다. 야구나 축구 시즌이 1년 내내 진행되지 않고 반드시 휴지기를 두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다. 만약 시즌이 1년 내내 계속된다면 야구팬이나 축구팬들은 좋아하는 경기를 항상 볼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갈수록 수준이 떨어지는 경기를 보면서 짜증을 내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연주자나 성악가들도 3~4개월 정도 공연 스케줄을 비워두는 기간을 둔다. 이를 무시하고 1년 내내 공연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손가락이나 성대를 다쳐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접는 경우까지 생긴다.

하물며 아직 어리고 미처 여물지 않은 학생들이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공부에 지쳐 주저앉고 배움을 놓아버리는 나약한 젊은이들을 양산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들에게는 문자 그대로의 방학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들이 방학보다 개학을 더 좋아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이 아이들의 미래가 이제 그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적신호에 다름 아니다. 이 신호를 빨리 감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녀를 사랑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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