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배터리·핸드폰 생산 과정의 생식독성물질 사용과 노동자 정신·신체 질환 등 노동안전 실태를 밝힌 조사 결과가 기사화되자 삼성이 공격적 언론 대응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왔다. 보고서가 “허위”라는 삼성 주장에 조사를 수행한 단체들이 공개 반박하고 바로잡았지만, 언론사 30여곳이 삼성 측 입장을 검증 없이 받아쓰며 이른바 ‘기사 밀어내기’가 이뤄졌다.

금속노조·전국삼성전자노조 등이 참여하는 삼성전자계열사노조연대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삼성전자계열사 노동안전보건실태 조사연구보고서 발표회를 열었다. 조사에 따르면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과 관련해 문제가 된 발암성·생식독성 물질이 삼성전자 무선통신과 가전, SDI(배터리), 전자재료 생산 공정에서 상당수 사용됐다. 삼성 노동자 건강 실태는 일반인구에 비해 크게 열악했는데, 노동자들은 성과 압박으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와 과로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에도 시달렸다.

조사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조 등이 수행했다. 지난해 7월부터 약 7개월간 삼성전자 761명, 삼성전자서비스 894명, 삼성SDI 36명, 삼성전자판매 110명 등 4개 사업장에서 총 1801명의 노동자가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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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전자계열사 4곳과 일반인구 자살 관련 경험 비교. 출처=삼성 전자계열사 노동안전보건실태 조사연구보고서

보고서 발표 직후 삼성은 뉴스룸 입장문을 내고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는 즉각 언론 보도로 퍼졌다. 네이버 포털 뉴스페이지 검색결과에 따르면, 7일 낮 현재 37곳의 언론사가 삼성 뉴스룸의 입장을 받아 보도했다. 하루 앞서 발표된 ‘삼성 전자 계열사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보고서’ 내용을 기사화한 언론사는 9곳이었다. 언론이 삼성 노동실태 조사 결과보다 이를 반박하는 삼성 측 입장을 4배가량 많이 보도한 셈이다(네이버 검색제휴 언론사 기준).

삼성은 입장문에서 ‘전자계열사 직원들 가운데 자살을 생각한 비율이 사업장 별로 9.2~16.7%에 달해 일반 인구에 비해 10배를 넘는다’는 조사 결과를 두고 “명백히 사실을 왜곡한 허위 주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건강검진 결과 많게는 10배 가량 수치를 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정 항목은 수십배 과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성 측은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가 과장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직원 건강검진 수치를 요구하는 질문에 “공식 입장 외에 별도로 답변할 내용은 없다”고 했다.

삼성은 입장문에서 ‘배터리·휴대폰 공장에서 발암물질이 다량 사용되고 있다’는 연구결과엔 “비과학적인 공포조장”이라며 이들 물질이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은 “문제는 사용 여부가 아니라 엄격히 통제된 작업환경에서 안전하게 사용되느냐다”라며 “삼성은 관련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며 임직원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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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삼성 뉴스룸 입장문 갈무리

조사와 연구를 수행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조, 전국삼성노조 등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이들은 5일 입장문에서 “삼성의 주장이야말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삼성은 언론 영향력을 활용해 문제를 호도하지 말고, 노동자들의 심각한 건강상태 개선대책을 마련하라”고 밝혔다.

먼저 삼성이 비과학적 공포조장이라고 주장한 ‘휴대폰과 배터리 공장 CMR(발암성, 생식독성, 유전독성)물질 비율’은 삼성이 환경부에 제출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였다. 단체들은 “혹시 휴대폰·배터리 공장 사용 화학물질의 CMR 비율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라고 되물으며 “삼성전자가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직접 환경부에 제공한 정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CMR은 여러 인체유해성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관리하는 항목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더 엄격하게 관리되는 공포스런 물질이 맞다”고 강조했다.

▲삼성 깃발 ⓒ연합뉴스
▲삼성 깃발 ⓒ연합뉴스

이들 단체는 ‘문제는 발암물질 사용 여부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유해화학물질 관리 원칙의 첫째는 ‘사용금지와 대체물질 사용’”이라는 점이 국제 표준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EU 유해화학물질법’과 ‘영국직업안전보건규정’을 사례로 들며 “(사용금지 원칙이) 주요 선진국의 산업안전보건·화학물질관리 법제와 국제기구의 화학물질 관리방안에 항상 거론되는 국제 표준”이라고 짚었다.

이들은 CMR 물질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며 “삼성의 독성화학물질 대체사업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가 사용을 금지한 노말헥산이 삼성SDI 청주사업장에서 사용되는 대표적 사례가 제시됐다. 반도체 직업병 사태로 사회 비판이 커진 뒤 삼성도 반올림과 합의로 세운 삼성옴부즈만위원회의 ‘중대유해물질 입고금지제도’ 등 독성화학물질 대체방안을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삼성 입장문을 쓰고 검토한 담당자들은 삼성전자가 그동안 해온 개선방안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단체들은 “이번 연구에서 독성화학물질이 ‘엄격히 통제된 환경에서 안전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SDI 노동자들은 독성화학물질 분진이 날리는 가운데 작업하고, 피부노출과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성전자 설비 유지보수 노동자들의 노출 실태 증언도 있다”고 했다.

단체들은 삼성 입장문에 대해 “그동안 삼성이 냈던 입장들에 비춰도 매우 부정확하고 부실하다”며 “연구발표를 보도하지 않았던 통신사들이 삼성의 입장을 중심으로 보도했고, 순식간에 이를 받아 쓴 수십 개의 언론보도가 이어졌다. 삼성에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언론에 경고해 추가보도를 차단하고, 연구내용을 보도한 기사를 덮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삼성이 이런 반박글로 노동자 응답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야말로 노동자의 입을 막으려는 탄압”이라고 했다.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3일 고 황유미씨 유해가 뿌려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한 야산을 찾아 영정 앞에 삼성 전자계열사 노동안전보건실태 조사연구보고서를 놓아뒀다. 황씨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급성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진 노동자다. 반올림 제공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이 지난 3일 고 황유미씨의 17주기 추모제에서 그의 영정 앞에 삼성 전자계열사 노동안전보건실태 조사연구보고서를 놓아뒀다. 황씨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급성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진 노동자다. 반올림 제공

단체들은 “언론의 사실확인 보도를 다시 한 번 촉구드린다. 자세히 주석을 달았으니 언론이 꼭 확인해 팩트체크해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5일 반올림 등이 입장문을 내고 이틀이 지난 7일 현재까지 이 보고서나 반박을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미디어오늘은 5~6일 입장문에 대한 근거자료와 반올림 측 반박에 대한 사측 입장을 요청했다. 삼성 측 언론대응 담당자는 6일 “뉴스룸 공식입장 외 별도 답변드릴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 이상수 반올림 활동가는 미디어오늘에 “삼성의 태도가 반도체 직업병 상태 때와 변함없이 무성의하다고 느껴져 안타깝다”며 “지난해 삼성전자 베트남공장의 메탄올 중대재해 규탄 기자회견 당일에도 기자회견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삼성 측 입장만 실은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번에도 기사로 밀어내기 현상이 반복됐다. 삼성이 언론 영향력을 동원해 논점을 흐리지 말고 노동안전보건 실태에 제대로 대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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